정부는 한.일 수교협상 과정에서 일본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경제발전에 쓰겠다는 의욕이 앞섰던 나머지 개인보상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정치적 교섭을 통해 협상 초기에 내세웠던 3억6천4백만달러의 피해보상 요구액중 3억달러를 무상원조로 받은 뒤 당초 보상요구액의 19분의 1 수준인 1천8백98만달러만을 피해자 보상에 지출했다. 정부는 징용 징병등 피해자들의 목숨과 노동을 댓가로 받은 돈을 자본재 및 원자재 도입(1천77억원),농림수산업 개선(4백2억원),종합제철공장 건설(1백74억원) 등에 쏟아부었다. ◆보상액 규모 놓고 정치적 타결 우리 정부는 1963년 3월 자체 피해자 통계를 근거로 한국인 피해자 1백3만2천6백84명에 대해 총 3억6천4백만달러의 피해액을 보상해줄 것을 일본측에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군인·군속 수는 24만2천3백41명,종전 당시 한국인 노무자 수는 32만2천8백90명으로 낮춰 잡았다. 부상자 수는 알려지지 않아 보상대상에 넣기 곤란하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양측은 1962년 10월 맺어진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바탕으로 무상 3억달러,유상 2억달러,상업차관 3억달러에 타협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북한의 대일 청구권 △재일한국인의 청구권 △소멸되지 않은 청구권의 범위 등에 대해 면밀히 따지면서 차후 문제가 생길 소지를 없애는데 주력했다. 이에 대해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일협상은 양국이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타결한 것으로 개인보상을 국익 증대에 전용한 것도 결국 정치적 판단의 문제로 남는다"고 평가했다. 정부 관계자는 "당시 무상원조 3억달러의 가치는 지금의 환율과 경제력을 고려할 때 5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며 "이 돈이 없었으면 지금의 경제성장이 이뤄졌을까 의문이 든다"고 밝혔다. ◆정부 개인보상 의지 없었다 협정 체결 이후 우리 정부는 '대일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 등을 제정,1975년부터 77년까지 8천5백52명의 사망자에게 위로금으로 25억6천5백60만원(1인당 30만원),7만4천9백67명에게 일제시대 재산권 보상비용으로 66억2천2백9만3천원을 지급하는 등 총 91억8천7백69만3천원(당시 환율 기준 1천8백98만달러)을 지급하는 선에서 개인보상을 마무리했다. 고정환율제였던 1975년 당시 환율이 달러당 4백84원이었던 점을 감안해도 정부가 사망자 1인에게 지불한 돈은 6백22달러로 한·일회담 당시 정부의 제시금액인 사망자 1인당 1천6백50달러에 턱없이 모자란다. 정부가 개인피해 보상을 명목으로 일본측에 배상금을 요구했으면서도 실제로는 개인피해자 보상을 외면한 셈이다. 이에 따라 피해당사자 및 유족들의 한·일 정부를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소송이 줄을 잇고 한·일,북·일 간에 외교적 마찰을 야기하는 등 후폭풍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박정희 정부는 협정 추진시점부터 피해자에 대한 보상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1965년 5월 열렸던 7차회담 4차회의에서 한국측 이규성 주일공사는 "무상 3억달러는 농업분야와 사회간접자본 등에 중점 사용하고 유상 2억달러는 공장 설립,철도,해운 등에 집중 사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일본으로부터 받은 보상금을 피해자 보상이 아닌 경제 개발에 집중 투입할 계획이 이미 마련돼 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