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 < 논설위원 > 80년대 후반까지 대다수 직장에서 여성은 결혼하면 퇴직을 강요받았다. 입사할 때 아예 각서를 받거나 결혼까진 봐줘도 임신하면 그대로 퇴사시켰다. 88년 남녀고용평등법 시행 이후 퇴직 강요는 불법이 됐지만 그렇다고 기혼여성의 사회생활이 수월해졌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똑같이 일해도 가사는 여성만의 몫이고 아이를 낳으면 키워줄 사람이 없다. 시댁이나 친정에서 돌봐주지 않으면 도우미의 신세를 져야 하는데 믿을 만한 사람을 구하기도 쉽지 않고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좀 크면 나을 것 같지만 어림없다. 학교에 들어가면 문제는 더 커진다. 초등학교 과제물은 아이용인지 엄마용인지 분간하기 어렵고,중·고교생 엄마는 밤 늦게 학원 앞에서 기다리고 온갖 정보를 좇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법이나 제도에 상관없이 일과 가정 중 하나만을 선택하도록 강요받는 셈이다. 그러니 미혼여성은 '직업은 필수,결혼은 선택'이라며 결혼 자체를 시큰둥해 하고,기혼여성 절반(45.5%)이 자녀가 없어도 된다고 하는 마당이다. 게다가 2003년 국내 가정의 월평균 자녀양육비는 1백32만1천원으로 소득의 56.6%에 달했다. 이러고도 보장되지 않는 미래 때문에 수많은 가장들이 자녀의 조기유학을 위해 아내까지 외국으로 보낸 채 혼자 기러기아빠 노릇을 한다. 낳기도 키우기도 힘든 나라에 사는 결과는 2002년 세계 최저 출산율이라는 사태로 나타났다. 수명은 늘어나는데 아이는 안낳으니 사회가 늙어간다. 전체 인구의 중간 나이가 34세,노령화지수(14세 이하에 대한 65세 이상 비율)는 자그마치 43.3이다. 급기야 출산 장려가 국가적 과제로 등장했다. 여성의 출산휴가를 60일에서 90일로 늘리고 보육비 일부를 지원하는데 이어 내년부터는 남편에게 5일간의 의무 출산휴가를 주도록 관련 법을 고치겠다고 한다. 출산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보육에 대한 남성의 참여 없이는 여성들의 출산기피 현상을 막을 수 없다는 취지에서다. 출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출산휴가 확대와 남편의 의무출산휴가제 도입 등은 따라서 지극히 당연한 조치다. 문제는 기업이 여성의 출산 및 육아에 따른 비용을 부담할 자세와 여력이 돼 있느냐 하는 점이다. 실제 모성 보호를 위한 법과 제도가 오히려 기업의 여성 고용을 기피하게 함으로써 여성의 비정규직화를 부추긴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국내의 대졸 이상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56.6%로 OECD 회원국(평균 78.4%) 중 최하위이고,그나마 일하는 여성의 70%가 비정규직인 게 현실이다. 법과 현실 중 어느 쪽이 중요하냐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법을 그냥 두면 인식이 쉽사리 바뀌지 않는 게 사실이고 그렇다고 법을 앞세우면 예기치 않은 부작용이 따르는 것도 분명하다. 기업의 경우 불황 속에서 각종 추가부담을 떠안지 않으려 여성의 정규직 고용을 기피하고 이는 여성의 결혼과 출산을 더 막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1백m 달리기를 하다 보면 목표지점을 앞두고 넘어지는 수가 잦다. 마음같아선 금방 골인지점에 닿을 것 같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통에 발보다 가슴이 먼저 나가다 넘어지는 것이다. 저출산은 여성의 사회진출에 대한 배려 부족과 무거운 교육비,불안한 현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출산수당을 주거나 나라가 위태로우니 많이 낳으란다고 해서 낳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법보다 중요한 건 언제나 건전한 일반상식과 그것이 지켜질 수 있는 여건이다. 제아무리 좋은 법과 정책도 강도 조절이 필요한 건 그런 까닭이다.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