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이 깊은 불교 집안의 한 처자가 불경스럽게도 집에 찾아온 스님을 연모한다.


도반(道伴ㆍ함께 수행하는 동무)들과 며칠을 묵다 길을 떠나는 스님을 붙잡고 처자는 부부의 연을 맺기를 간청한다.


스님은 뿌리치지만 처자는 죽기를 각오한 채 매달린다.


처자의 부모까지 나서 자비로써 제도해달라고 읍소한다.


애욕(愛慾)을 초탈한 수행자로서 끝내 거부할 것인가,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부터 살려야 할 것인가.


전북 부안군 변산면의 월명암(月明菴)을 찾아가는 길은 이런 화두와 함께 시작된다.


신라 진평왕때의 부설(浮雪)스님은 처자의 목숨을 구하는 일을 선택했다.


사람이 죽을 줄 뻔히 알면서 외면한 채 수행이 되겠는가.


목숨을 구하고 수행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환속한 부설은 처자와 부부의 연을 맺고 아들 딸을 낳았다.


그리고 수행을 계속해 마침내 깨달음을 이뤘다.


또한 스님을 환속케 한 묘화 부인은 1백10세까지 보살행을 실천하다 입적했고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도 출가해 모두 득도(得道)했다.


월명암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웬만한 절이나 암자까지 찻길이 나 있는 지금도 월명암은 걸어서 올라야 한다.


내변산 입구의 남여치 매표소에서 가파른 산길을 한시간쯤 걸어 오르자 두 개의 바위가 신선처럼 정상을 지키는 쌍선봉 아래에 월명암이 앉아 있다.


산중에 어디 이런 터가 있었을까 싶을 만큼 기운이 수승(殊勝)하다.


월명암은 부설 거사가 스님일 때,도반인 영조·영희 스님과 함께 지리산을 거쳐 변산에 와서 세웠던 묘적암(妙寂庵) 인근에 자리한 암자다.


부설 거사가 입적한 뒤 등운과 월명은 아버지의 사리를 모신 묘적암 인근에 각각 초막을 짓고 수행했으며 그 초막이 등운암과 월명암이라고 전해온다.


월명암 경내는 조용하다.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즈음 나타난 공양주 보살에게 선원장 스님의 처소를 물어보니 "지금은 정진 중"이라고 한다.


잠시 후 선원장 일오(一悟·62) 스님이 관음전 위쪽 선방에서 내려와 차실로 안내한다.


"원래 월명암 터에는 법당이 세워졌고,등운암 터에는 지금 사성선원(四聖禪院)이 자리잡고 있어요.


'사성'이란 부설 거사를 비롯한 일가족 4명이 모두 득도해 성인이 된 것을 뜻합니다.


월명암과 부설 거사의 이야기는 구전으로만 전해오다 부설의 행적과 일화,선시,월명암의 연혁 등을 기록한 '부설전' 필사본이 월명암에서 발견되면서 사실로 확인됐지요."


일오 스님은 "월명암이 일제 때와 6·25 때 전소되다시피 한 상황에서도 '부설전'이 소실되지 않은 것은 묘한 일"이라고 했다.


부설 거사 일가족의 중생제도 원력(願力)이 '부설전'을 살아남게 했을까.


월명암은 예부터 전국의 몇 안되는 '산상무쟁처(山上無諍處)'로 이름이 높다.


산상무쟁처란 뛰어난 경치와 땅의 기운으로 인해 스스로 번뇌와 분별이 끊어지고 가라앉는 장소를 이르는 말.월명암은 대둔산 태고사,백암산 운문암과 함께 호남의 3대 영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그러나 일오 스님은 이런 이야기에 대해 '비유일 뿐'이라고 경계한다.


"아무리 좋은 터라도 자기가 정진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정진을 열심히 해야 그 터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것이죠.수행하지 않아도 터만 좋으면 된다면 누구나 명산만 찾아다니지 않겠어요? 다 자기 할 나름입니다."


사실 월명암은 터는 좋지만 생활이 편하지는 않은 곳이다.


해발 4백m가량의 고지대에 있는 데다 찻길이 없어 가파른 산길을 걸어서 올라야 한다.


물도 넉넉하지 않고 이름이 알려지면서 등산객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와 수행에 지장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도 수행의 전통은 언제나 살아 숨쉰다.


월명암에 여럿이 모여 수행하는 선원이 생긴 것은 1915년.학명 스님이 등운암 자리의 초가집 방 2개를 선방으로 삼아 봉래선원을 열면서부터다.


한국전쟁 때 월명암이 전소되면서 선원이 문을 닫은 이후에도 묘적암에서 3∼4명이 정진을 계속했고 지난 92년에는 정면 5칸의 선원 건물을 신축해 사성선원을 개원했다.


지금까지 이곳을 거쳐간 스님들의 면면은 쟁쟁하다.


근대 고승인 학명 용성 고암 해안 월인 만허 소공 스님 등이 월명암에서 정진했고 원불교를 창교한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와 그 뒤를 이은 정산 종사도 이곳에서 한때 공부했다고 한다.


또 사성선원이 문을 연 이후에는 재작년 입적한 전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서옹 스님이 조실을 맡아 납자들을 지도했다.


사성선원과 묘적암에 걸린 서옹 스님의 친필 편액은 지금도 살아 꿈틀대는 듯하다.


사성선원의 안거 정진 대중은 10명 안팎이다.


지난해 하안거에는 8명이 정진했고 이번 동안거에는 대웅전을 원래의 월명암 터로 옮겨짓는 불사 때문에 방부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선원장 일오 스님은 혼자서 선방을 지키며 정진을 멈추지 않는다.


"근기가 뛰어나 한번에 모든 공부를 다 해치우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부지런히 하는 수밖에 없어요.


출가 수행자는 누가 뭐라 해도 첫째가 정진이거든요.


아무리 말세에 살아도 정신 차리고 정진하면 그 사람은 말세인이 아닙니다."


일오 스님은 "부설 거사 이야기도 삼생의 연분으로 도과(道果·깨달음)를 얻으려는 원력으로 봐야 한다"고 해석한다.


부설,묘화,등운,월명의 인연이 닿은 산중에 눈이 내린다.


부설 거사가 이 겨울 중생들을 위해 내리는 법문일까.


부안=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