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관가에 복지부동(伏地不動)이라는 단어가 유행한 적이 있다. 공무원들이 보신주의에 빠져 현안에 대한 의사결정을 미루거나 아예 손을 대지 않으려는 자세를 꼬집는 것이었다. 요즘은 이 용어가 관가 공무원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주요 대기업 최고경영자의 경영 행태를 비판하는 데도 사용된다. 수천억,수조원대의 현금을 쌓아놓고도 단기 성과와 안정적인 경영기조에 집착한 나머지 미래의 성장을 견인할 신사업 발굴이나 신규투자를 주저하는 기업들이 많다는 것이다. 경기회복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기업들에 거는 일반의 기대가 커질수록 기업들의 "복지부동"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물론 기업들도 할 얘기는 있다. 외환위기 이후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가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경영의 안정성과 상시 구조조정을 중시하는 경향이 생겨났고 기업의 확장전략을 부정적으로 보는 풍토가 조성됐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보수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인사들이 대거 CEO 그룹에 진출하면서 '관리형 기업가'들이 득세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리더십 패러다임이 바뀐다 그럼에도 재계 내부에 자성론이 일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지난 2000년 이후 저성장 국면이 이어져온 데는 일정부분 기업들의 책임도 있다는 것.전경련이 6백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외환위기 이전 5년간의 투자증가율은 18.2%에 달한 반면 외환위기 이후 5년간은 연평균 3.6% 증가한 데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은 "최근 설비투자가 위축된 이유는 일상화돼 있는 정부의 규제 탓도 있지만 기업 스스로 리스크를 떠안는 자세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재계가 올해 모색하고 있는 새로운 리더십은 '창업가형 기업가정신'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과거 개발경제시대를 이끌었던 모험과 도전정신을 부활시켜 5년,10년 후 우리를 먹여살릴 글로벌 제품을 육성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 모델은 지난해 2월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강신호 전경련 회장을 만나 "창업가형 기업가를 우대해야 한다"고 말한 이후 점차 설득력과 실행력을 얻어가고 있다. 삼성이 향후 반도체 사업을 비롯한 주력 사업에 총 70조원을 투자한다는 중장기 계획을 발표한 것을 필두로 한보철강 인수를 통해 자동차·철강 분야의 세계적인 강자를 꿈꾸고 있는 현대자동차,디지털 가전과 휴대폰을 앞세워 세계 톱을 꿈꾸는 LG,2007년까지 에너지 자급률을 10%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총 5조원 규모의 투자계획을 발표한 SK 등이 뒤를 잇고 있다. ◆결실을 거두려면 재계는 창의적 기업가 모델이 다시 각광받으려면 사회 전반의 분위기 조성이 긴요하다는 입장이다. 우선 경영진에 대해 단기 업적 위주로 평가하는 풍토를 자제하면서 안정적인 경영권 보장 장치를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은 "상당수 대기업의 외국인 지분율이 50%가 넘는 상황에서 1년짜리 초단기 실적으로 경영진 교체 압력이 들어온다면 누가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를 늘리려 하겠느냐"며 "경영의 투명성과 윤리성 확보를 전제로 기업들의 중장기 성장전략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출자총액제한제도와 같은 직접적인 투자 규제나 산술적인 기업지배구조를 중시하는 정책 관행도 기업의 도전과 혁신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지적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외국인 주주와 시민단체의 엄정한 감시 속에 정부까지 갖가지 규제의 사슬을 죄어오고 있는 상황에서 무작정 설비투자와 고용을 늘리라는 주문은 무리"라며 "투자를 제약하는 기업제도와 정책들이 먼저 재고돼야 한다"고 말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