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제1차 북핵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1994년 6월 평양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게 유엔의 제재는곧 전쟁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압박카드를 썼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는 30일 카터를 만나기 직전까지 김 주석은 미국의 속내에 대해 끝까지 의구심을 갖고 협상 전략을 짜느라 고심했던 비화를 소개했다. 웹사이트에 따르면 김 주석은 당시 북핵 위기로 급속도로 냉각된 북ㆍ미관계가카터 방북으로 해빙될 것이라는 외신의 예측을 무시하고 이를 테면 미국이 제재 착수에 앞서 명분을 쌓으려는 의도로 카터를 보냈다는 판단을 갖고 있었다는 것. 당시 정황은 마치 한국 전쟁에서 휴전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서도 새로운공세를 꾀했던 미국의 `음흉한 술책'을 연상시켰다고 웹사이트는 말했다. 이에 따라 김 주석은 카터와 협상에서 곧바로 구체적 현안을 놓고 협상에 들어가지 않고 우선 양국간 신뢰 구축의 중요성을 강조, 분위기를 조성하고 나서 압박카드를 꺼내는 협상 전술을 시도했다. 김 주석은 6월 16일 카터와 첫 만남에서 부드럽지만 진지한 목소리로 "지금 우리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제기되는 것은 믿음이다. 서로 믿음이 부족하여 여러 가지문제에서 오해들이 생겼다"고 먼저 말을 건넸다. 두 사람 사이에 의례적인 덕담이 오고 가면서 긴장된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들자김 주석은 마침내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김 주석은 "미국이 우리 핵문제를 유엔에 끌고 가서 제재를 가하겠다고 하는데지금까지 제재를 받으면서도 살아왔는데 더 제재를 받는다고 살지 못할 것 같은가"라면서 노골적으로 카터를 압박했다. 이런 압박카드는 실제로도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돈 오버도퍼가 쓴 `두 개의 한국(The Two Koreas)'은 "북한이 국제 사회의 제재를 받느니 차라리 전쟁을 택할 것이라는 생각에 카터는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잠을이룰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를 계기로 협상은 급물살을 타게 됐다. 카터가 김 주석과 협상 타결을평양에서 전화로 워싱턴에 알린 것은 다음날인 6월 17일.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대북 제재 결의안 추진을 최종 승인하고 존 샐리카쉬빌리합참의장으로부터 대북 공격을 염두에 둔 미군 배치 계획을 보고받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카터가 평양에서 날린 전화 한 통으로 회의는 중단됐으며 한반도 역시가까스로 전면 충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서울=연합뉴스) 조계창 기자 phillif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