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 뺑소니' 혐의를 받는 가수 김호중이 경찰 출석 과정에서 취재진을 피하려 하면서 '도둑 출석', '늑장 귀가' 등 논란이 추가로 불거진 가운데 당일 그의 패션이 뒤늦게 주목받고 있다.김호중은 지난 21일 오후 2시 서울 강남경찰서에 출석해 3시간가량 조사를 받았다.조사가 끝난 건 4시 50분께였으나, 그가 경찰서를 나온 시각은 무려 6시간이나 지난 밤 10시 40분께였다. 김호중은 "취재진 앞에 서고 싶지 않다"며 귀가를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그는 검은색 재킷에 모자, 안경 등을 착용한 상태로, 왼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경찰서 밖으로 걸어 나왔다. 출석할 당시 지하 주차장을 통해 경찰서로 들어가 취재진을 피했던바. 늦은 시간임에도 현장에서 종일 기다린 취재진의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를 그대로 받았다.김호중이 착용한 검은색 재킷은 몽클레르 바라니 봄버 재킷으로 지난 시즌 제품이다. 공식 홈페이지 판매가는 970달러(약 132만원)였으며, 현재는 해외 직구 및 구매대행 사이트 등에서 120만~150만원대에 판매되고 있다.한 안경 브랜드의 모델이기도 한 김호중은 이날 크롬하츠로 추정되는 안경을 착용했다. 검은색 테와 골드 유광의 안경다리가 조화를 이루는 이 제품은 안경테 윗부분에 크롬하츠의 로고가 들어가 있는 게 특징이다. 해외 판매 사이트에서 3200달러(약 435만원)에 판매하고 있다.신발은 루이비통의 최근 시즌 상품으로, 신발 옆면과 앞면에 해당 브랜드를 상징하는 모노그램이 프린팅됐다. 공식 홈페이지 기준 가격은 177만원이다. 모자는 국내 의류업체 빈스모크 제품으로 7만9000원에 판매되고 있다.한편 서울 강남경찰서는 22일
안성 미리내성지로 가는 길 어디쯤 좌회전해서 외길로 끝까지 들어가면 정정엽 작가의 작업실이 있다. 정정엽의 작업실은 가장 높고 막다른 곳에 있어서, 눈이 많이 내렸던 지난 겨울 어느 날은 차를 길에 버리고 올라가야 했다.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오는 높이였다. 하지만 어쩌면 오르막이야말로 정정엽 작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올해 초 킬리만자로 정상 등반을 했을 정도로 산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눈을 비비며 정상 등반 확인증 사진을 전송받고서야 ‘아니, 선생님은 왜 또 위험하게 그런 험한 산을... 그런데 킬리만자로가 어디 있더라...’하고 검색을 해 보았다. 정정엽 작가가 올랐던 우후루 피크는 해발 5895m로 세계에서 네 번째로 높으며 드넓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고 한다. 바로 할 말을 잃었다.김혜순 시인이 정정엽 작가를 떠올리며 썼던 시 <물구나무 팥>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정엽이는 집 떠나고 싶으면 등산용 배낭을 짊어지고 설거지를 한다. / 2층 마당으로 트렁크를 던지기도 한다.”[1] 그리하여 높이로 치자면 참으로 작가와 잘 어울리는 이 작업실은, 차로 들어가도 구불구불 좌우의 바퀴 앞이 닿는 곳을 확신하지 못한 채 긴장하며 들어가야 한다. 낭떠러지에 떨어질 것만 같은 기분으로 구석에 주차를 하고 현관을 열면, 또다시 높은 계단이 시작된다.어떤 작가의 작업실이나 문을 열고 발을 디디면 그 자신의 작품이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법이지만, 정정엽 작가의 현관 계단 양쪽 벽에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이 걸려 있다. 정정엽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한 점 판매될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 中)수십년 넘게 많은 독자들이 애송하는 시 중 하나인 <가난한 사랑노래> 등을 쓴 문학계 거목 신경림 시인이 22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암으로 투병하던 신 시인은 이날 오전 경기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숨을 거뒀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고인은 1936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충주고와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동국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6년 '문학예술'에 시 <갈대>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까맣게 몰랐다./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갈대> 中)등단 후 10여년 간 시를 쓰지 않고 고향 충주로 낙향해 농사일부터 공사장 인부, 장사, 학원 강사 등 갖은 일을 했다. 이때 경험은 고인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삶을 시에 담아내는 데 자양분이 됐다.1971년 발표한 시 <농무>는 농촌 현실과 농민의 삶, 핍박받는 민중의 애환 등을 노래했다. 그는 이 시에서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를 잊고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시고, 풍물놀이에 맞춰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리는 농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했다. 고인의 시는 질박한 생활 언어로 현실을 노래한 '민중적 서정시인'이란 평가를 받는다.생전에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호암상 등을 받았으며 2001년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고인의 장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