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2년 한국증시가 빗장을 열었을때,투자자들은 외국인들이 투자하는 종목에 깜짝 놀랐다. 당시엔 건설주 금융주 무역주 등 이른바 '트로이카주'가 인기를 끌었던 때였지만 이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외국인들은 대신 태광산업 한국이동통신(현재 SK텔레콤) 신영(현재 신영와코루) 대한화섬 등 국내투자자의 관심권 밖에 있던 장기 소외주를 집중적으로 사들였다. 증권업계는 이것을 '저 PER(주가수익비율)혁명'이라고 불렀다. PER는 기업이 벌어 들이는 이익에 비해 주가가 어느 수준에 와 있는가를 나타내는 지표다. 일반적으로 PER가 낮으면 주가가 싸고,높으면 고평가 됐음을 의미한다. 외국인이 집중적으로 사들인 종목은 바로 이 PER가 낮은 종목들이었다. 한마디로 기업가치에 비해 주가가 낮아 앞으로 상승가능성이 높은 우량주를 사냥한 것이다. 국내 투자자들이 기업가치와 주가를 연결시켜 보기 시작한게 이때부터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후 PER은 물론 PBR(주가순자산비율) ROE(자기자본이익률)등 기업가치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들이 중요한 투자의 잣대로 자리잡았다. 장기투자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도 이 때쯤이다. 건설업종이 뜨면 건설주들이 덩달아 오르는 게 보편화돼있던 그 당시에 외국인들은 가치개념도 소개했다. 건설증권이라는 증권사까지 단지 '건설'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이유로 상한가를 치던 웃지 못할 때였다. 증시개방은 또 회사를 중시하던 컴패니 캐피털리즘(company capitalism)에 빠져 있던 국내기업에 주주를 중시하는 캐피탈리스트 캐피털리즘(capitalist capitalism)이라는 변화를 요구했다. 주주가치에 대한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이런 변화는 지난 98년 자본시장이 완전 개방된 이후 더욱 본격화됐다. 주주가치 중시 정책으로 국내기업의 배당성향이 높아져 투자자들 사이엔 이제 고배당주 투자가 당당한 투자전략으로 자리잡고 있다. 외국인들이 한국증시를 좌지우지하며 기업사냥에까지 나서 큰 이슈가 되고 있지만 국내증시에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투자기법을 전파한 것은 확실한 공로다. 한화증권 이종우 리서치센터장은 "외국 기관들은 한국증시에 들어와서 국내 투자자와 기관들에게 마치 구한말 개화기때와 비슷한 충격과 자극을 줬다"면서 "지금도 이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지만 아직 국내 증권·투신사는 '따라하기'에 급급한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조주현기자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