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해운엔 이상한 "폭탄주"가 있다. 양주와 맥주의 배합비율이 다른 게 아니라 잔 모양이 특이하다. 유리컵 아래를 뾰족하게 만들어 테이블에 세울 수가 없다. 컵 옆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손가락으로 막아야 술이 새지 않는다. 폭탄주가 돌아가면 즉각 마실 수 밖에 없게 "설계"된 이 잔의 주인은 최원표(崔源杓-62) 사장이다. 최 사장이 이 잔을 들고 회식자리에 나타면 모두 각오해야 한다. 적으면 여섯잔,많으면 열다섯 잔까지 돌아간다. 어디서 이런 잔을 구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최 사장은 호걸(豪傑)형 CEO다. 타고난 근성에 카리스마가 넘친다. 조직 장악력과 업무 추진력은 해운업계에서 정평이 나 있다.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에서 직장생활한 이력 때문인지,그는 요즈음 젊은이들의 유약한 모습이 못마땅하다. "도전정신이 없고 정신력도 약해 '올인'을 할려고 하지 않는다.남자들이 특히 그렇다"고 한다. 그는 인천남고와 중앙대 경제학과(60학번)를 나와 67년3월 한진상사(현 ㈜한진)에 입사했다. 굳이 한진상사를 선택한 것은 돈을 빨리 벌기 위해서다. 부친이 일찌감치 사회활동을 접은 탓에 그의 집안은 넉넉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3남3녀 중 장남이다. 동생들도 신경써야 하는 처지였다. 당시 한진상사는 월남에서 미군의 군납 용역사업을 하고 있었으며 현지 주재원들은 생명수당을 포함해 상당한 임금을 받았다. 68년3월 최 사장은 월남 퀴논지사에 발령을 받았다. 해운부 총무과 사원으로 미 군함이 내려놓은 군수물자를 미군기지로 운송하는 업무를 맡았다. 첫 월급은 2백80달러.1년치를 꼬박 모으면 서울 갈현동에 국민주택 한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최 사장은 담이 크다. 월남에서 근무를 시작한지 두달만인 68년5월.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야간 기습으로 B-42라는 소형 로켓포탄이 숙소와 식당에 떨어진 적이 있다. 다들 피신하기 바빴지만 최 사장은 도망가기는커녕,현지 경비를 맡고 있던 맹호부대 군인들을 도와 베트콩 추격 작전에 가담하기도 했다. "진짜 전쟁터였습니다. 하지만 회사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위험을 무릅써야 했고 저는 월남 근무를 자원한 말단 신입사원이었습니다. 각오하고 떠난 길이 아니었다면 중간에 근무를 포기했을지도 몰라요." 위험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다. 68년 구정을 기점으로 베트콩의 대공세가 시작되면서 막사에는 수시로 폭탄이 떨어졌다. 군수품 수송길에 베트콩들을 만나 여러차례 죽을 고비도 넘겼다. 베트콩보다 더 무서운 것이 정글의 독충과 독사,그리고 이름 모를 풍토병이었다. 군수물자를 싣고 베트콩을 피해 정글을 우회하고 나면 시름시름 앓아눕는 직원들이 속출했다. 최 사장은 그런 월남의 전쟁터에서 만 4년을 꼬박 채워 근무했다. 통상 1~2년이면 본사 직원과 교대하는 것이 관행이었지만 회사가 월남에서 완전 철수할 때까지 남아있었다. 72년2월 2백여명의 직원들이 모두 떠나고 난 뒤에야 서울행 마지막 군용기에 올랐다. 목수와 요리사를 포함해 7명만이 탄 비행기였다. 당시 조중훈 사장(한진그룹 창업주,2003년 작고)이 홍콩에 들러 구경을 좀 한 뒤 귀국토록 배려했을만큼 그는 목숨 걸고 일을 했다. "월남 정글에 바쳤던 4년의 청춘은 제게 많은 것을 안겨주었습니다. 귀국 이듬해 서울 미아리에 집도 장만하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소득은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어요." 72년4월 대한항공 인사부로 발령이 났다. 당시 대한항공은 민영화 3년째를 맞이하고 있었다. 인사 업무가 그의 외향적인 스타일과 맞지 않아보이지만 일은 하기 나름이다. 대리 시절이던 76년 그는 사내 종합체육대회를 기획했다가 퇴짜를 맞았다. 전례가 없는데다 비용도 많이 든다는 이유에서였다. 다음해 또 다시 같은 기획안을 내밀었다. 완고한 상사들의 반대가 만만찮았지만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았다. 체육대회를 가장 잘 한다는 삼성을 찾아가 벤치마킹도 해둔 터였다. 그해 가을 인하대학교에선 2천여명의 임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항공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체육대회가 열렸다. 대한항공 종합 체육대회는 '최 대리'가 78년 해외영업을 위해 로스앤젤레스 지점으로 나간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열리지 않고 있다. 한진해운과 인연을 맺은 것은 87년 대한항공 영업부에서 이사가 되고 난 뒤의 일이다. 당시 한진그룹이 공기업이었던 대한상선을 인수하는 과정에 실무 팀장을 맡은 것.하지만 한진해운에 안착하기까지는 다시 9년의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89년 ㈜한진의 사업이 삐그덕거리자 그룹은 최 사장을 영업담당 상무로 내려보냈다. ㈜한진은 대한항공에 비해 규모나 업무 수준에 있어서 비교도 안될 정도로 열악했다. 처음 입사했던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월급쟁이가 어쩌겠는가. "조금 섭섭했어요. 하지만 금방 마음을 추슬렀습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한진은 듣던대로 어려웠다. 화물운송과 고속버스 사업의 수익성이 흔들리고 있었다. 특히 화물트럭 기사들의 기강이 엉망이었다. 철제품을 싣고 포항과 울산을 오가는 기사들은 한적한 곳에 '단체로' 차를 대놓고 밤 새워 고스톱을 치기 일쑤였다. 최 사장은 40여개에 달하는 지방 점포를 한햇동안 여덟바퀴나 돌았다. '열심히 일해야 회사가 돈을 벌고 여러분들도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빤한 논리 밖에 없었지만 정성을 다해 설득을 해나갔다. 때로는 특유의 술 실력으로 기사들의 '군기'를 잡기도 했다. 생산성이 차츰 올라가기 시작했다. 택배사업도 새로 시작해 재미를 보기 시작했다. 기반이 어느정도 잡히자 이번에는 정신없이 '뺑뺑이'를 돌리는 인사가 이어졌다. 90년엔 다시 대한항공으로 발령나 여객영업을 3년간 맡았다. 93년엔 전무로 승진해 ㈜한진의 영업본부장으로 옮겼다. 이어 한진해운 총무담당 중역(96년),한국공항 부사장(99년) 으로 계속 자리가 바뀌었다. "왜 그렇게 빈번하게 옮겨다녔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내가 역마살이 낀 모양이라고 할 정도였어요." 하지만 그는 어느새 한진에서 손꼽히는 물류 전문가가 돼 있었다. 육상-해상-항공 물류를 모두 거치며 영업과 관리 업무를 섭렵했기 때문이다. 최 사장은 자신이 CEO가 된 요인을 스스로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다른건 몰라도 제가 잔꾀는 부리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문제를 풀려고 했어요. 윗사람들 눈치 안보고 직언도 많이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최 사장의 '싹수'는 월남에서 모든 직원들을 보내고 난 뒤 마지막으로 귀국길에 올랐던데서 일찌감치 드러났다. 일개 사원이었지만 생과 사가 엇갈리는 전쟁터에서 이만한 근성을 보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대리 신분으로 체육대회를 밀어붙여 관철시켰던 일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해 9월 태풍 '매미'로 인해 부산 감만-감천 터미널이 침수됐을 때 최 사장은 물에 잠겼던 6백개 정도의 컨테이너 화물을 일일이 개봉해 조사토록 지시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하주들에게 솔직하게 통보해주었다. 운송사 입장에선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지만 최 사장은 휴일에도 터미널을 찾아 직원들을 독려했다. 주요 하주인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습도에 민감한 전자제품의 선적을 보류해 클레임을 방지할 수 있었고 최 사장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굳이 고객만족의 중요성을 얘기하지 않는다. "화물은 말이 없지 않습니까?" 이 간결한 멘트가 국내 최고 물류 전문가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조일훈 기자 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