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밤나무 고목으로 만든 월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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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혜 < 동화작가 >
들녘을 걷다가 마른 물봉선 꽃잎이 고스란히 수첩 속에 담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보랏빛 숫잔대와 함께 잎 하나하나가 제 기억을 간직한 채 잠들어 있었다.
야생화는 그야말로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비바람에도 강인하게 견디며 자신을 지키는 키 작은 들꽃들.
이런 자생식물을 키우며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기에 찾아갔다.
우리 들꽃만 고집하며 40년을 지냈다는 어르신.칠순이 넘었는데도 들꽃처럼 꼬장꼬장하며 강인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통나무를 깎고 다듬느라 정신이 없었다.
꽃을 키우다 말고 통나무를 깎는 이유를 물었다.
올림픽 선수들에게 월계관을 만들어 주려는 것이라 했다.
그는 선수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끼니도 거른 채 온 정성을 다해 다듬었다.
죽은 통나무를 깎아내고 손질해 당신의 혼을 불어넣는 작업이었다.
재료는 밤나무 고목이었다.
밤은 싹이 나도 썩지 않는다는 것이다.
월계관은 우승자의 영원히 빛날 영예이기에 밤나무 고목을 택한 것이란다.
그는 만들어진 월계관을 쓰고 환하게 웃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뜨개질을 하고 계셨다.
요즘은 계절마다 좋은 옷들을 쉽게 구할 수 있는데도 늦은 시간까지 자식들과 손자의 옷을 준비하신다. 닳은 손끝에 굳은살까지 박여 소나무 등걸 같은 손이지만 그 손에 담긴 사랑은 무한하다.
자생식물을 키운다는 어르신의 마음도 그러했으리라.
자생식물을 키우는 그분 얘기를 했을 때 어머니 눈에서 빛이 났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이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라고.결과도 중요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뜨개옷은 분명 얼마 입지 않고 장롱 속에 깊이 잠겨있을 테고,어르신이 만든 월계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 수고의 마음은 우리 안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리마라는 사람 대단해.보통사람 같으면 뛰지 못했을 텐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경기장으로 들어오더라.환한 미소까지 띠면서 말이야."
어머니의 목소리는 승리자의 목소리만큼이나 힘찼다.
선두에 있다가 마라톤 테러를 당하면서도 3위로 완주하며 미소와 여유를 보여준 리마.그는 끝까지 경주를 포기하지 않았다.
결승선에서 비행기 세리머니까지 펼치는 여유를 보였다.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밴 제스처다.
관중은 '리마,리마'를 연호하며 눈물까지 닦아가면서 열렬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시상대에서도 그는 동메달을 목에 건 채 금메달리스트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그 일에 대해 불평하고 싶지 않다.중요한 것은 올림픽 정신에 입각해 자신을 극복하고 조국 브라질에 메달을 바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도 리마에게 근대 올림픽 창시자의 이름을 딴 '피에르 쿠베르탱 메달'을 수여했다. 진정한 스포츠 정신을 기리는 메달이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다리를 절뚝이며 꼴찌로 들어온 탄자니아의 마라토너 아쿠와리의 눈물겨운 모습이 생각난다.
아쿠와리는 출발 신호가 울린 뒤 옆사람에게 강하게 부딪히며 나뒹굴었다.의사의 진단은 이 상태로 뛰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몸이 아닌 영혼으로 달렸던 것이다.
메인 스타디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불이 꺼져있었고 심판들의 지루한 몸짓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결승점에 골인하고 그대로 넘어져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를 안아 일으켰을 때 그의 눈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미소와 함께. 부상을 당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한 그의 모습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가장 감동적이고 올림픽다운 장면이었다.
메달 색깔이 중요한게 아니다.
아름다운 스포츠 정신이 있기에 희망과 용기를 갖고 다시 살수 있는 것이다.
요즘처럼 어려울 때 경기불황과 실직,고단한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불굴의 마라톤 정신은 더욱 절실하다.이들을 위해 정성껏 월계관을 만드는 들꽃연구 할아버지와 밤늦도록 뜨개질하는 어머니,그리고 눈물로 응원하는 관중이 있지 않은가.
좌절의 늪에 빠진 사람들이여.다시 일어나 도전하라! 기회는 아직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