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말기의 진성여왕(887∼897)에게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가 붙어다닌다.

나라를 망쳤을 뿐만 아니라 성적(性的)으로 문란했던 여제(女帝)라는 평가가 그것이다.

그러나 소설가 김정산씨의 평가는 이와는 다르다.

김씨는 진성여왕이 망해가는 신라를 다시 일으켜세우고자 개혁을 시도했던 '유일한' 임금이었다고 주장한다.

김씨의 새 역사소설 '칼날 위의 길을 가다'(랜덤하우스중앙,전2권)는 귀족 세력들의 사치와 부패,지방 호족세력들의 대두,농민 반란 등 혼란스러운 신라 말기의 사회상을 배경으로 '개혁 군주' 진성여왕의 삶을 조명한 책이다.

'칼날…' 속에 묘사되는 신라 말기의 사회는 현대사회 못지않게 혼란스럽다.

진골 귀족세력들이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부패를 일삼는 가운데 뇌물수수,인사청탁,재산착복,대리 군역 등이 빈발했다.

이에 반발해 중국 유학을 다녀온 최치원 등 6두품 세력을 중심으로 젊은 개혁세력들이 등장한다.

백성들의 살림은 곤궁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임금은 나름대로 개혁정책을 펴보지만 기득권 세력은 그들대로,백성들은 백성들대로 호응해 주지 않는다.

"신라는 진성여왕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닙니다.

여왕이 등극하기 전부터 이미 수많은 세력들의 반란과 혈투로 나라의 기틀은 이미 허물어져 있었습니다.

여왕이 등극할 무렵엔 천년사직의 허울만 남아 있었지요.

후세 사람들이 붙여준 '진성(眞聖)'이라는 존호도 '진실로 성스러운 분이셨다'는 찬사에 다름아닙니다."

김씨는 여왕의 섹스 문제에 대해서도 "신라의 모든 남자 임금 중 어린 처첩을 거느리지 않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며 "한창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의 나이에 권좌에 오른 여왕이 소년 장부 두세명쯤 거느린 것이 큰 허물이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김재창 기자 char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