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파리의 연인'은 끝까지 화제를 뿌렸다.

최종회를 어떻게 마무리지을까를 놓고 인터넷상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최종회 대본은 결국 네티즌들의 요구를 반영해 수정됐다.

시청자들의 힘은 막강해졌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야 시청률이 오르고 광고단가가 높아진다.

아무리 예술적이고 멋진 결말이라도 시청자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이면 성공하기 어렵다.

이런 변화는 팬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관철시키는 팬덤(fandom)의 시대 한복판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작은 징표일 뿐이다.

스타가 만들어내는 영향력을 뜻하는 스타덤(stardom)에 대비해 세력화된 팬들의 힘을 의미하는 것이 바로 팬덤이다.

비단 연예계뿐만 아니다.

팬덤은 이제 일반적인 현상이다.

프로스포츠에서 팬들이 성적이 부진한 감독을 끌어내리고,특정 선수를 스카우트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주도적인 힘으로서의 팬덤이다.

정치도 예외가 아니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까지는 그래도 국민과 지지자들의 지원을 믿고 독자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스타덤'의 리더십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팬덤 시대의 스타다.

'노사모'라는 팬클럽이 있고 초반에 불리했던 대통령 선거전을 뒤집은 것도 인터넷과 커뮤니티 활동을 기반으로 한 팬들의 힘이 컸다.

팬덤 시대의 스타는 그러나 한계가 있다.

노 대통령도 노사모와 자신을 지지한 시민단체,노동계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팬덤은 어찌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역사적 흐름이다.

대중민주주의 시대에 팬덤은 여론형성의 밑바탕이기도 하다.

문제는 팬덤이 과연 중장기적이고 전략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냐에 있다.

드라마나 스포츠야 열성적인 팬들에 의해 시청률과 인기가 좌우되는 것인 만큼 팬덤이 의미가 있지만 과연 다른 부분에서도 먹힐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우선 기업쪽을 보자.비즈니스 세계에서 볼 때 팬덤은 고객우선주의다.

고객이 만들어달라는 것을 만들어주고,고객이 원하는 서비스를 개발해내는 것이다.

팬덤은 그러나 기업 입장에서 볼 때는 기껏해야 작은 성공밖에 거두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지난 70년대 일본의 품질혁명을 선도한 미국 통계학자 에드워즈 데밍의 말대로 "소비자는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데밍은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것을 예로 들며 "어떤 소비자가 에디슨에게 전구를 발명해달라고 부탁했느냐?"고 물었다.

팬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갔다가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혁신'에는 도달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하물며 여러 집단의 이익 조정과 조화를 목적으로 하는 정치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참여정부 들어 나타나고 있는 여러가지 갈등과 시행착오는 노 대통령과 정부·여당이 이런 팬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물론 팬들의 말을 제대로 따르면 작은 성공은 거둘 수 있다.

여기다 정치인들로선 지지자를 무시할 수 없는 한계도 있다.

분명한 것은 팬 혹은 고객,소비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역사적 발전이나 원대한 비전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전쟁과 평화' 같은 소설이 독자들의 요구를 찾아내 그것을 건드렸기 때문에 고전이 됐던가.

스타는 팬덤의 한계를 넘어설 때 진정한 스타가 될 수 있다.

팬덤의 한계를 넘어서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팬의 범위를 넓히는 일이다. 경제만 살리면 국민들은 금방 '골수팬'으로 변한다.

충분히 슬기롭게 이용할 수 있는 팬덤에 노 대통령이 여전히 끌려다니고 있는것 같아 하는 얘기다.

한경 가치혁신연구소장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