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관계를 거부하는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성행위를 강요한 남편에게 법원이 형법상 '강제추행 치상죄'를 적용,처음으로 유죄를 선고했다.

이번 판결은 부부간에도 상대방의 허락없이 성관계를 강요할 경우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는 취지의 판결로,그 동안 부부간 강간죄를 인정하지 않았던 대법원 판례와 배치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최완주 부장판사)는 20일 아내를 강제 추행하고 다치게 한 혐의(강제추행 치상 등)로 불구속 기소된 김모씨(45)에 대해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아내가 이혼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자녀의 방에서 자고 있는 아내의 두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강제로 성추행해 상해를 입힌 점 등 공소사실이 모두 유죄로 인정된다"며 "부부간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이 같은 행위는 용인될 수 없다"고 밝혔다. 성적 자기결정권이란 일상생활에서 여성이 성행위를 자신의 의사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재판부는 "대법원이 지난 70년 '부부간 강간죄'를 인정하지 않는 판결을 내렸지만 이번 사건은 부부간 강제추행의 경우로 대법원 판결에 저촉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이어 "대법원 판례를 부부간 강제추행까지 부정하는 취지로 해석하더라도 3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는 재검토할 여지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지난 2002년 9월 기소된 김씨는 심리 과정에서 아내를 강제추행하거나 협박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하지만 검찰이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실시한 결과,아내의 말은 진실반응이,자신의 말은 거짓반응이 나오자 김씨는 공소사실을 모두 시인했다.

재판부는 양형이유에 대해 "피고인이 잘못을 뉘우치고 있고 초범인 데다 술취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점을 참작해 형 집행을 유예한다"고 밝혔다.

김씨 부부는 지난 7월 서울가정법원에서 임의조정을 통해 피고인 김씨가 재산 중 일부인 2억2천만원을 아내에게 양도하는 것을 조건으로 이혼이 성립됐다.

< 여성계 "男 그릇된 인식 경종 ‥ 환영" >

여성계는 이번 판결로 아내에 대한 성폭력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며 일제히 환영의 뜻을 표명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내 아내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남성의 그릇된 인식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여성단체연합과 한국여성민우회 등 4개 여성단체는 법률 전문가들과 함께 여성인권법 소위원회를 구성해 성폭력특별법과 가정폭력방지법 등 관련법 개정안을 작성,다음달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외국의 경우 합법적 부부간이라도 한쪽이 원하지 않을 때 강제로 성관계를 가지면 강간죄가 성립되는 등 일찍부터 엄격하게 법을 적용해왔다.

미국에서는 77년 이후 대부분의 주에서 아내 강간에 대한 면책을 폐기했고 영국에서도 94년 부부 강간을 인정했다.

일본도 지난 62년부터 파탄된 부부관계에 한해 강간죄를 인정해왔다.

강동균 기자 kd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