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병의 근원은 사랑의 결핍이다. 사랑과 증오의 감정이 억압될 때 그것이 에너지 방출을 촉발시키고 신체기관들을 공격해 망가뜨려 놓는다."

정신분석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수많은 임상실험을 통해 내린 결론은 김인식 감독의 미스터리 멜로 '얼굴 없는 미녀'를 관통하는 주제다.

사랑의 상실로 파멸에 이르는 남녀의 극단적인 심리가 정신분석학적으로 해부돼 섬세한 비주얼로 옮겨졌다.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내면 풍경이 화면에 가장 잘 구현된 한국 영화 중 하나로 평가된다.

도입부는 지수(김혜수)의 환각이다.

책상 위의 집기들이 허공을 떠돌다가 남편이 실내로 들어오는 순간(현실이 인식되는 찰나)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난다.

이 장면은 종반부에 지수의 정신병을 치료하던 의사 석원(김태우)의 환각으로 변형된다.

시작과 끝의 중간은 두 사람의 관계 진척과 이들의 상처로 채워져 있다.

두 주인공의 환각 증세는 애인으로부터 버림받은 공포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현실과의 타협이다.

지수가 앓는 '경계선 성격장애'는 옛 연인에게서 버림받은 상처로 신경증을 넘어 정신병으로 발전한 단계다.

상대를 소유하고 싶은 열망이 좌절됐을 때 자기 파괴라는 극단적인 양상으로 변질된 것이다.

지수와 석원의 관계는 정신분석 치료의 모순성을 보여준다.

환자가 과거의 감정과 갈등을 치료자에게 쏟아내는 '전이'와 치료자가 환자에게 갖는 무의식적 반응의 총체인 '역전이' 과정을 거치면 의사와 환자 사이에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십상이다.

등장 인물들이 사는 '텅 빈 듯한' 공간은 현대인의 고독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카메라가 피사체에 서서히 다가가면 그 공간에는 유리조각 같은 섬뜩한 물체들이 가득하다.

사물들은 저마다 개성을 지닌 듯 다양한 색깔과 모습을 갖췄다.

뚜렷한 콘트라스트 조명은 공간과 사물들간의 대립각을 강화시킨다.

등장 인물들의 부조화스럽고 분열적인 내면과 조응하고 있다.

'건강 미인' 김혜수는 감정의 극단을 오가는 인물로 매끄럽게 변신했다.

옛 연인과의 섹스와 옛 연인으로 착각되는 석원과의 섹스 장면에서는 감성의 미묘한 차이를 표현했다.

짙은 화장과 얼굴을 덮을 듯한 퍼머 머리,원색의 밍크코트 등 스타일 면에서도 황폐한 내면을 감추고 싶은 심리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6일 개봉,18세 이상.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