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한 발 재겨 디딜 곳 조차 없다//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 밖에/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민족시인 이육사(李陸史?1904∼44)가 1940년 '문장(文章)'지에 발표한 '절정(絶頂)'으로 저항시의 백미로 꼽힌다.

일제통치 아래에서 40년의 삶을 온전히 살았던 육사는 민족의 수난을 극복하려는 굳은 의지와 일제에 대한 끝없는 저항으로 일관했다.

중국·만주를 넘나들면서 벌인 독립운동,그 질곡 속에서의 17번에 걸친 투옥,창씨개명과 신사참배 거부,광복을 몇 개월 앞두고 베이징 감옥에서의 옥사 등은 표면적인 인생역정일 뿐이다.

민족에 대한 그의 열정은 너무 뜨거웠고 어느 한 순간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육사는 이를 '청포도'에서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노래했고,'광야'에서는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라고 묘사했다.

자신의 본명(이원록)을 버리고 죄수번호(264)를 이름으로 지을 만큼 떳떳했던 육사는 시인이면서 항일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조선혁명군 정치군사학교를 다니면서 명사수로 이름을 떨쳤는가 하면,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의 일원으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뒤 베이징대학에 다니면서는 루쉰(魯迅)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변장술에도 능했다고 한다.

피상적으로 알려졌던 육사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지금 그의 고향인 안동에서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탄생 1백주년을 맞아 기념관이 세워지는가 하면 학술회의 토론회 백일장 시화전 문집발간 예술제 등의 행사에서 그의 생애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서 저항수단으로 시를 썼던 육사의 존재는 광복절을 며칠 앞두고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듯하다.

"비 한방울 내리잖는 그 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라고 읊은 그는 아직도 우리 곁에 살아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것 같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