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낳은 정과 기른 정 가운데 무엇이 더 소중하냐'는 물음은 섣불리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이다.

하지만 올해 50돌을 맞은 애경그룹은 분명 '낳은 어머니'보다 '기른 어머니'에게 더 큰 빚을 졌다.

일개 비누제조회사였던 애경을 현재 생활용품·화학·유통 3개 분야에서 16개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 그룹으로 일궈낸 장본인은 고(故) 채몽인 창업자가 아니라 30여년간 자식(애경)을 키워온 장영신 회장(68)이기 때문이다.

자식 잘 기른 공을 인정받아 최근 한국경영사학회로부터 여성 최초로 '창업대상'을 받은 그는 13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인복이 많아 그간 애경 임직원들이 잘 도와준 덕택"이라며 겸손해했다.

장 회장은 50년대 경기여고와 미국 체스넛힐대(화학과)를 나와 당시 여자로선 드문 '엘리트'였지만 고(故) 채몽인 사장과 결혼한 후엔 여느 여성처럼 평범한 주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결혼 생활 12년만인 1970년 남편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인생은 1백80도 바뀌었고 '집구석에 틀어박혀 남편의 유업을 그냥 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2년뒤인 1972년 37세의 나이로 경영을 시작하게 됐다.

사업 인생 자체를 '위기'에서 출발했지만 장 회장은 정면돌파를 통해 '위기는 기회'라는 말을 몸소 실천해 온 경영인으로도 유명하다.

"취임한 지 1년만에 1차 오일쇼크로 계열사인 삼경화성(현 애경유화)이 원자재 부족 위기에 처했죠.삼경의 무수프탈산 공장이 돌아가려면 오소크실렌(OX)을 수입해와야 하는데 당시 일본 수입선인 미쓰비시가스케미컬도 석유파동으로 OX 생산에 필요한 나프타가 부족했던 거예요.

어차피 일본에 가 봤자 소용이 없다고 보고 당시 유공과 합작 중인 걸프사의 미국인 사장을 찾아가 '일본에 나프타를 추가로 공급해 달라'고 부탁했죠.다행히 걸프사에서 일본에 수출할 나프타 물량을 늘려줬고,일본에선 OX를 삼경에 줘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죠."

30년 넘게 사업을 해 오면서 주변에 서로 의지하고 담벼락이 돼 줄 여성 동지들이 없어 너무 힘들고 외로웠다는 그는 "이젠 기업 환경도 많이 바뀌어서 여성들의 경제활동이 많아졌다"며 "앞으로 제2,제3의 여성 창업대상 수상자가 나오길 바란다"고 밝혔다.

물론 후배 여성 기업인들에 대한 애정어린 충고도 잊지 않았다.

"한국 여성들의 자질은 누구보다 뛰어납니다. 똑똑하고 능력있죠.하지만 여자를 중간 관리직에 앉혀놓으면 그 밑에 남자들이 붙어있질 않아요. 리더는 똑똑하다고만 되는 게 아니거든요. 리더는 다른 사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감을 갖고 해결하는 의지를 갖춰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방실 기자 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