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피아니스트 되기가 이렇게 힘든 줄 몰랐어.저 좋아서 한다고 하니 말리지도 못하고,지켜보고 있자니 안쓰럽고."

힘겨운 7년여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가 과연 한국에서 피아니스트로 성공할 수 있을까,아버지의 걱정은 끝이 없다.

씁쓸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후배에게 나는 쓴웃음으로 답할 뿐이다.

후배는 어색한 듯 딸아이의 귀국 피아노 독주회 전단을 건네주고는 저만치 앞서 걸어간다.

놀이터에서 신나게 떠들어 대는 친구들을 창문 너머로 힐끗거리며 건반을 두들겨대는 초등학생,24시간 연습벌레로 살아가는 중학생,한권 한권 쌓여 가는 악보의 무게에 매일 밤 가위 눌리는 고등학생.이제 진정한 연주자의 길로 들어서느냐,아니면 그냥 음악을 좋아했던 한 사람으로 남느냐의 갈림길에 선다.

대학입시라는 치열한 전투에서 얻어낸 월계관의 기쁨도 잠시,쉴새없이 계속되는 연습과 경쟁속에서도 가슴 설레는 연애,실연의 아픔,결혼 그리고 출산의 고통을 겪으며 예술과 현실은 한바탕 전쟁을 치른다.

예술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승화시키기 위해 몸부림치고,현실은 저만치 줄달음질친다.

서로를 힘들고 지치게 하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예술을 향한,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그칠 줄 모른다.

그리고 주섬주섬 악보를 챙겨 유학길에 오른다.

지금까지 그를 버티게 만들었던 음악에 대한 자신감은 우울한 자괴감으로 바뀌고,우물 안 개구리였던 그에게 몇 곱절의 고통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물 밖의 하늘로 뛰어 오르는 순간의 기쁨이란 그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진실한 음악의 즐거움을 가슴에 담고 다시 즐거운 귀향을 준비한다.

후배의 무거운 뒷모습과는 달리 자신감에 가득 찬 딸아이의 포스터에서 나 역시 익숙한 고통과 귀향의 즐거움을 읽는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선 노파심 어린 걱정이 조심스레 고개를 든다.

어쩌면 우리는 백화점 할인 전단 보다 귀국 연주회 포스터를 더 많이 접한다.

그리고 할인 전단을 훑어보듯 포스터 속의 이미지나 연주자의 약력만을 확인한 후 '오늘 한번 가볼까'하고 나설 수도 있다.

동기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기왕에 내친 걸음,귀향길에 멋지게 차려입은 그의 의상이나 걸음걸이가 다소 어색하고 서툴더라도 개의치 말자.힘겨운 자신과의 싸움에서 당당히 이기고 돌아오는 그들의 귀향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는 여유를 부려봄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