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제금융시장에서는 한국경제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한창이다. 최대 관심은 한국 내에서 다시 일고 있는 위기론의 실체다. 국제금융기관들은 한국과 같이 외환위기를 겪은 국가들의 위기는 크게 세 단계를 거친다고 보고 있다. 먼저 외화유동성에 금이 가면서 생기는 외환위기다. 외환위기를 겪게 되면 한국처럼 담보 관행이 일반화된 국가에서는 금융위기로 비화된다. 금융위기로 기름(돈)을 공급해 주는 엔진에 문제가 생기면 실물경제 위기로 치닫게 된다. 물론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도 이 수순을 거쳐야 한다. 우선 외화유동성을 확보해 대외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위기를 촉발한 부실을 털어내야 금융과 경제시스템의 복원이 가능하고 궁극적으로 경제가 안정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다행히 한국은 외환위기 초기에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를 바탕으로 여타 금융위기국에 비해 외화유동성을 빨리 확보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경기가 회복되고 국가신용등급도 이제는 세계 3대 신용평가회사들이 'A'등급으로 상향 조정할 만큼 개선됐다. 문제는 최근 들어 위기론이 또다시 거론되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금융기관들은 크게 두 가지 점을 주시하고 있다. 하나는 경제현실에 대한 경제주체간의 인식 차가 위기론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평가다. 공교롭게도 한국의 정책당국자들은 지금 97년 외환위기로 몰릴 때와 마찬가지로 경제지표의 양호함을 들어 위기가 아니라는 소위 '펀더멘털론'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반면 국민들은 체감경기가 안좋은 점을 들어 위기론에 공감하는 대조적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다른 하나는 경제주체간의 책임 공방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현안에 대해 경제각료들은 급한 불을 끄다 보면 꽃밭을 밟게 되는 소방관에 비유한 '꽃밭론'을 제기하고 있다. 즉 정부 출범 이후 대내외 악재 속에서도 노력한 결과 이제는 경기가 회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저지른 사소한 일로 우리 경제의 불안감이 가시지 않고 있다고 해서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입장이다. 반면 시장에서는 경제현안에 대한 정부의 처리방식을 놓고 '바가지론'으로 맞서고 있다. 지난 몇년간 강원도 일대에 난 큰 불도 초기 단계에는 몇 바가지의 물만 있으면 진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출범 이후 경제현안에 신속히 대응했으면 최소한 지금과 같은 위기론은 제기되지 않았다는 시각이다. 이 부분은 중요한 지적이다. 과거의 경우 우리처럼 외환위기 극복 이후 경제가 계속 안정되느냐 여부는 얼마나 빨리 시스템 위험을 치유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국제금융기관들은 신용공여 지속 여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바로 이 부분에 대한 평가를 중시한다. 대부분 외환위기 국가들은 유동성 위험을 해결한 후 시스템 위험을 해결하는 단계로 순조롭게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이 과정에서 현재 한국의 정책당국자처럼 꽃밭론에 취해 실기할 경우 '경제위기론'이 대두되는 게 일반적이다. 결국 국제금융기관들의 이같은 평가로 보아 최근의 한국경제 위기론은 '경제주체간의 신뢰위기'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책당국자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여전히 꽃밭론에 취해있다 보면 현재 논의 차원인 위기론이 가시화될 수밖에 없다. 경제팀과 국민들간 경제에 대한 인식 차가 줄어들어야 지금의 신뢰위기를 극복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논설·전문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