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明燮 < 고려대 경영대학 교수 > 철강부족으로 온 나라가 야단이다. 도로와 항만 건설이 중단되고 있는가 하면 기업의 생산 활동도 위축되고 있다. 급기야 일제시대에나 있었던 고철 모으기 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수요 예측의 실패로 철강의 원료인 원석을 제대로 구매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기업들은 전통적으로 구매 관리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돈만 있으면 누구든지 또 언제나 물건을 사올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물건을 사면서 하청업자로부터 칙사대접을 받는 것은 물론 리베이트 방식으로 뇌물을 받아 물의를 일으키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전문성이나 능력보다는 '믿을 수 있는 측근'들에게 구매를 맡겨 주먹구구식 관리를 하는 풍토마저 생겨났다. 이러한 악순환의 과정을 거치면서 구매는 수요기관의 요구에 따라 물자를 구입하는 비전문적,수동적 역할에 머물러 왔다. 이제 상황이 바뀌고 있다. 경제 구조가 고도화되고 상품의 수가 많아지면서 시세예측과 전망은 기업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가 됐다. 여기에 아웃소싱 열풍까지 불어 구매관리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세계의 주요 기업들은 본사의 덩치를 대폭 줄이고 외부 협력업체를 통해 제품을 생산토록 하는 아웃소싱을 확대해가고 있다. 종전처럼 일부 부문만 외주를 주는 원청 및 하청 방식이 아니라 통째로 맡기는 것이다. 선진 기업들은 아예 기본 핵심역량만 남기고 대부분의 업무를 외부 협력업체로 돌리고 있다. 예를 들어 HP프린터는 휴렛팩커드사의 대표적인 제품 중 하나다. 그런데 HP사가 프린터 관련 제품을 직접 생산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두 공급업체를 통해 아웃소싱하고 있다. 나이키의 경우도 전세계적으로 발굴한 협력업체를 통해 신발을 제조 판매한다. 이들 기업의 핵심역량에 대한 전략적 선택은 마케팅 능력,제품개발 능력,그리고 효율적 글로벌 소싱 능력이다. 반도체 제조업체인 인텔은 구매책임자 역할을 가장 좋은 반도체를 조기에 출시할 수 있도록 외부에서 필요한 기술을 구입하는 데 더 비중을 두고 있다. 한편 업계의 경쟁구도도 개별기업간 경쟁에서 협력업체를 포함하는 공급망간 경쟁으로 바뀌고 있다. 즉 과거엔 도요타와 GM이 경쟁을 했다면 이제는 도요타와 도요타의 수천개 협력업체가 GM과 GM의 협력업체들과 총체적으로 경쟁을 한다는 것이다. 최근의 고속철도 파동은 구매의 전문성이 중요함을 새삼 깨닫게 한다. 차의 진행방향과 반대로 만들어진 '거꾸로' 좌석에 대해 승객들이 어지럼을 호소하고 있으나 당국은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 계약서상에 "개통 후 2년 내에 좌석구조를 변경하면 제작사는 더 이상 하자보수 의무를 지지 않는다"라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꾸로 좌석'을 없애려면 재계약이 필요하고 이 경우 1천억원 이상의 비용이 추가로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진국 사례에 대한 사전조사와 구매계약서의 각 항목에 대한 타당성 검토를 이용자의 관점에서 얼마나 철저히 했는지 의문스럽다. 구매의 전략적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요즈음 선진국에선 CPO가 뜨고 있다. 'Chief Purchasing Officer'의 약자인 CPO는 '최고구매관리경영자'라는 뜻이다. CEO(최고경영자),CFO(최고재무관리경영자),CIO(최고정보관리경영자)에 이어 이제는 CPO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CPO들은 7년 전인 1997년 CPO 포럼을 결성했다. 이 포럼을 통해 기업의 선진 구매 행태에 대한 정보교환이 활성화되고 학계와 함께 구매이론을 접목시켜가는 구매의 혁신을 업계가 주도해 가고 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구매는 예술이다"고 말해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효율적 구매로 신화를 창조한 애니콜의 저력 뒤에는 시대를 앞서가는 그룹 총수의 독특한 구매관리 철학이 있었던 것이다. 기업경영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