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하순 중간고사가 임박하면 대학가의 연례행사인 등록금 투쟁도 서서히 끝을 본다. "등록금을 깎아서 부모에게 효도하자"며 시위하던 학생들이 드디어 2∼3%의 등록금 삭감 전리품을 얻고 개선하는 때인 것이다. 등록금 투쟁을 보면 대학생이 어떤 투쟁거리로 소일하는지 알 수 있다. 대학 학칙의 첫 조항은 학생의 자격을 규정한다. 학생은 소정의 등록금을 납부하고 수강신청을 마침으로써 수업을 비롯해 학생의 모든 권리를 부여받는 '등록'이 인정된다. 대학생 모두가 이 학칙준수를 서약한 만큼 등록 불이행은 학생신분의 포기와 같다. 이런 투쟁에 등록금을 학생회에 맡기고 동참함은 지각 있는 자라면 상상 못할 일이다. 5만∼6만원 학비 삭감하자고 한 달여 투쟁하는 일에 학비 학원비에 온갖 뒷바라지로 자식을 대학에 보낸 부모님 이름 파는 것 또한 생각할 수 없는 작태이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 대학세계의 현실이다.학생회가 선동하고 일부 학생이 참여해 시위는 시작된다.학교가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총장실을 점거하고 대학본부에서 농성한다. 법치사회라면 학교당국이 소정기간 내에 등록하지 않은 학생을 학칙대로 제적하고 불법점거한 학생의 강제퇴거를 경찰에 요구하면 될 일이다.그러나 우리의 공권력 당국은 애초부터 개입하려들지 않는다. 출동 대신 "학생들과 좋게 타협해 해결하라"고 대학을 타이른다. 그래서 학교와 학생간 학칙,서약,권리의무관계가 흐지부지되고 등록금이 이른바 '타결(妥結)'된다. 법치 무시와 타협을 강요하는 한국적 정치현장은 이렇게 뿌리가 시작된다. 청년들은 대학에 들어와 약속위반부터 배운다. 학생회는 질서를 파괴하고 선동하는 기술을 익힌다. 이들이 곧 사회인이 되고 학생회 간부는 정치지도자로 입신한다. 그 일부는 어린 학생의 선생이 되고 양민을 계몽하는 시민단체가 돼 불법투쟁과 불법점거가 모범적 투쟁수단임을 행동으로 가르친다. 오늘날은 공권력 집행자인 공무원 스스로가 불법 노조를 만드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들이 법질서 수호자의 직무를 우습게 여김은 당연하다. 대통령 자신이 "나한테 법, 법하지 말라"며 '법보다 밥'이 중요함을 말해왔다. 이렇게 법치가 무력하게 항복함을 목도하며 시민들은 법보다는 목적탈취의 수단이 더 중요함을 익혀왔다. 그리하여 법과 원칙으로 하자면 반민주가 되고 여론과 타협을 내세우면 민주세력으로 규정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지난 총선은 법치주의의 패배가 드디어 완결됐다는데 의미가 있다. 과거 '부정한 법질서'에 혁혁하게 투쟁했던 학생운동권 전교조 시민단체 민주노총 등 이른바 '민주집단'의 대표들이 총망라해 17대 국회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소위 민주개혁세력들은 정부 언론 시민집단에 이어 이제 국회까지 장악했으므로 더 이상 투쟁할 대상이 없어졌다. 국가의 입법기관까지 된 권력 스스로가 법질서와 공권력에 대항함은 스스로 자신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격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 법치의 회복을 기대해도 좋은가? 그런데 거대여당의 대표가 말하는 바는 오직 대화,타협과 상생의 정치이다. 그들이 불리해질 때 법의 결정을 수용하겠다고 결코 말한 바가 없다.그러나 법의 기둥이 흔들리는 집에서 어떤 대화와 타협,상생을 기대하는가. 과거 수많은 갈등사태에서 대화와 타협은 힘과 억지,극단행동과 교언(巧言)이 지배하는 게임이 돼왔다.상생(相生)은 약자가 양보할 때 생존함을 의미했다.강자나 약자나 법 앞에서만 평등할 수 있다.법 없는 땅에서는 강변과 실력행사가 판을 치는 해결장터가 있을 뿐이다. 여당은 또한 경제 살리기에 전력하자고 선전한다. 그러나 법과 공권력이 실종된 사회에서 어떤 기업이 장래를 확신하고 투자할 수 있겠는가. 임시방편의 친기업 정책기조가 언제 바뀔지 누가 장담할 것인가. 지난 선거에서 돈 안 쓰는 깨끗한 선거가 어떻게 정착됐는지 보자.말할 것도 없이 50배의 벌금을 물린 강력한 법 집행의 결과이다. 상생정치와 경제 살리기에는 백 마디 아름다운 말이 필요 없다. 여당 스스로 법질서의 절대준수를 서약하고,50배 벌칙같이 결단적 행동하나를 보여줌이 특효약일 것이다. kimyb@ca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