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교육대를 다녀온 총회꾼들은 한동안 자숙하며 지냈다. 전봇대를 들어올리는 집단체조에다 가혹한 기합과,무엇보다 젊은 장교들이 침을 튀겨대는 모욕적인 정신교육이 간단치 않았다. 전두환 신군부가 극우적 병영이데올로기를 관철시키고자 했던 80년대 초반의 풍경화다. 총회꾼이 필요악적인 존재냐는 것은 언제나 뜨거운 논란거리였다. 시즌이 다가오면 주요 상장기업을 순회하면서 기업 비리를 빌미로,혹은 주총을 무난히 넘기도록 해주겠다며 돈을 뜯어내던 그들이었다. 잡범들과 함께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적지 않은 봉변은 당했지만 2,3년 후에 빳빳하게 줄을 세운 재킷을 다시 차려 입고 빨간 행커치프를 상의 주머니에 꽂은 채 조용히 주총장으로 돌아왔다. 총회꾼이라고 해서 고함이나 지르고 행패나 부린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무엇보다 재무제표를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산업에 대한 전문적 식견은 물론 주총장을 압도하는 웅변술이며 그럴 듯한 풍채에 이르기까지 갖추어야 할 덕목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잘못 덤볐다간 경찰서에 끌려가기 일쑤였기 때문에 당연히 상법 증권거래법 등에 도가 터야 했다. 낭만주의 시대는 그러나 끝이 났다. 이제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갖추고 고도의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일군의 행동파 변호사들과 대학교수들이 그때의 선배들을 대신해 총회꾼으로 활약하고 있다. 당시나 지금이나 소액주주 보호라는 명분도 동일하고 주주가치 방어라는 논리도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고 사회적 지위 또한 확고해서 기업들이 이들을 상대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단순히 재무적 의사결정뿐만 아니라 지배구조에까지 비수를 들이대며 최근에는 경영권 분쟁에도 뛰어들어 종횡무진의 활약상을 보이는 그들이다. 어떤 행동파는 세계금융 중심지 월스트리트의 펀드 매니저들에게까지 명성이 자자해 이미 이 분야에서 경지를 이루었다. 암약하는 월가의 펀드매니저들이 뉴욕의 최고급 호텔로 그들을 모시기 바쁘고 프랑스 와인을 곁들인 만찬들은 우리의 총회꾼들을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다. 물론 그때마다 거액의 거마비를 지급하기도 한다니 총회꾼의 벌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쏠쏠하다. 급기야는 주총장을 건너뛰어 아예 회사 안방을 차지하는 분들조차 줄을 잇는다. 목소리가 커질수록 그들을 사외이사 따위로 모시기 바쁜 것은 정치의 논리와 다를 것이 없다. 감시자가 권력자를 겸하는 것을 부패의 출발이라고 보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기업이 망하고 주인이 바뀌었지만 어떤 운동가들은 몇년씩 그 기업의 사외이사 자리를 꿰차고 즐기고 있다. '내가 하면 사랑이요,너희가 하면 불륜'이라는 것은 대통령에서부터 총회꾼까지 차라리 시대 정신이라고 할 만하다. '내가 한 자리 하면 경영 투명성이요,너희가 하면 부패 경영'이라는 주의 주장이 가소로울 따름이다. 이 대열엔 변호사들도 빠질 수 없다. 한 쪽으로는 개혁 운동가를 자처하고 다른 쪽으로는 외국 투기꾼들을 위해 법률 장사의 좌판을 벌이고 있으니 양쪽에서 모두 이익을 취하는 꿩 먹고 알 먹고다. 총회꾼이 처음부터 총회꾼이었던 것은 아니다. 한두 번 단 맛을 보면서 점차 꿀독에 머리를 처박게 된다. 문제는 이것이 경영 투명성을 위한 약간의 사회적 비용이냐,아니면 경영의 본질마저 부패시키고 말 것이냐에 있다. 경영 투명성을 앞세워 결과적으로 기업 소유권의 사회화를 초래하고 있으니 자본시장이 제공하는 우파의 무기로 시대착오적 좌파 이념을 추구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운동의 과잉은 언제나 위험하다.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