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 한ㆍ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이 무산된 지난 9일 밤(한국시간).


지구 반대편 도미니카공화국 수도 산토도밍고의 멜리아호텔에서는 KOTRA의 중남미지역 수출 확대 전략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미국 애틀랜타를 거쳐 산토도밍고에 도착한 오영교 사장을 비롯해 우제량 중남미지역 본부장, 11명의 중남미지역 무역관장 등 모두 22명의 KOTRA 관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ㆍ칠레 FTA 비준 이후 중남미시장 전략을 논의했다.



한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이정훈 산토도밍고 무역관장의 휴대폰이 울렸다.


잠시 흐르던 침묵을 이 관장이 머뭇거리며 깨뜨렸다.


"국회 비준이 또 연기됐답니다."


이 관장이 오 사장에게 짧게 보고하자 모든 참석자들이 한숨을 쏟아냈다.


구자경 산티아고 무역관장부터 회의 자료를 밀어놓은 채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꼭 될줄 알았는데…현지에 돌아가서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지 막막합니다."


다른 무역관장들이 앞다퉈 말을 이었다.


"국회가 FTA를 비준하면 곧바로 한국 제품 판촉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이기로 했는데 어떡하죠."


"우리가 암만 뛰어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어요. 한국은 역외(域外)고 다른 나라는 역내인데 어떻게 똑같이 경쟁할 수 있겠습니까."


침통한 표정의 오 사장이 "상황이 이렇게 됐지만 중남미 국가들을 설득하는 작업을 계속합시다"라며 분위기를 바꾸려 했지만 답답하기는 오 사장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날 4시간 동안 계속된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한ㆍ칠레 FTA 비준 지연으로 한국이 진정 통상국가로 나아갈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워하는 현지의 분위기를 가장 걱정했다.


김건영 멕시코부 무역관장은 "중남미 국가들이 2,3중으로 자유무역협정을 맺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미주지역은 세계에서 지역주의가 극심한 곳"이라며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에 이어 미국 주도로 34개국이 참여하는 범미주자유무역협정(FTAA)도 내년 타결을 목표로 추진되고 있다"고 말했다.


오영교 사장은 "남미에 와보니 지역경제 체제가 완전히 굳어지고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면서 "정말 답답하다"는 말을 연거푸 쏟아냈다.


"중남미는 소지역을 넘어 대단위로 통합되고 있습니다. 일본도 올해 멕시코와 FTA를 맺게 되는데 우리는 한ㆍ칠레는 물론 다른 국가와의 FTA 체결과 비준에 소극적인 것이 너무도 답답합니다."


비준안 연기 소식을 접한 칠레 현지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현지에는 이미 "실지(失地) 회복의 기회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맹관호 현대종합상사 산티아고 지사장은 "한국산 전자제품과 승용차가 그나마 버텨온 것은 높은 브랜드 인지도 때문이었다"며 "하지만 또 다시 비준이 연기되면서 '코리아'라는 브랜드 자체에 대한 신뢰가 손상을 받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그는 "함께 일하고 있는 현지인 직원 3명에게 한국과 한국 정치인들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지 막막하다"고 덧붙였다.


"그 동안 다른 나라들이 칠레에서 무관세라는 '총'으로 싸울 때 우린 그나마 '칼'로 버텼는데 이젠 그 칼마저 잃어버린 느낌"이라고 맹 지사장은 푸념했다.


국내에서도 정치권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격앙되고 있다.


국회를 겨냥하던 비난은 이제 정부와 여당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집권 여당을 자처하는 열린우리당이 국익과 직결돼 있는 한ㆍ칠레 FTA 비준안 통과를 주장하면서도 과연 농촌당 의원 설득에 얼마나 노력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류시훈 기자 bad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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