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이 또다시 총선표에 굴복했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가 안되면 국가신인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경고와 우려도 정치인들에게는 메아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국회는 9일 본회의를 열어 한·칠레FTA 비준안을 처리할 예정이었으나 두달 앞으로 다가온 총선을 의식,논란을 거듭한 끝에 비준안 처리를 또 늦췄다. 지난해 12월30일과 1월8일에 이어 세번째다. 16일 본회의 처리라는 마지막 기회가 남아있긴 하지만 총선이 눈 앞이라는 점에서 "정부의 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 16대 회기 중 비준안 처리가 물건너가는 것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온다. 정략에 따른 국정발목잡기로 정치권에 대한 비난여론이 고조될 것으로 보인다. 비준안 처리 표류는 두차례 표결이 무산되면서 애당초 예견됐다. 농촌 출신 의원들은 농민단체의 압력이 한층 거세지고 있는 상황에서 눈 앞에 닥친 총선표를 의식하기에 급급했다. 농촌의원 14명은 이날 회의에서 한 목소리로 "정부가 제시한 농민대책은 빛좋은 개살구"라며 처리 연기를 주장했다. 일부 농촌 의원들은 "두달 사이에 달라질 게 아무 것도 없지 않느냐"며 "17대 국회가 책임지고 처리하는 게 순리"라고 주장했다. 한 의원은 "총선이 눈 앞인데 어떻게 비준안을 통과시킬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상당수 농촌 의원들도 이에 동의하는 분위기다. 더구나 국회 앞에서 1만여명의 농민이 비준안 통과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는 상황에서 의원들의 심리적 압박은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간 농민단체가 주도한 반대서명안에 공개 서명한 의원이 재적의원 과반수가 넘는 1백47명에 이른다는 점에서 비준안의 통과를 위해서는 무기명비밀투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투표 결과가 공개되는 상황에서 표결을 하기에는 부결에 대한 위험부담이 컸다. 농촌 의원들이 집단적으로 공개투표를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특히 무기명비밀투표 방식이 무산돼 비준안 자체가 부결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한 상황에서 각당 지도부는 표결을 강행하는 데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실제 결석한 의원 50여명 중 찬성입장인 도시출신 의원이 대다수였다. 이번에는 상당수 도시출신 의원들이 사실상 발목을 잡은 셈이 됐다. 물론 정부의 설득력없는 대응도 문제였다. 그간 여러 차례 대책을 내놓았으나 농민들은 이를 "미흡하다"며 수용하지 않았고 결국 정치권,특히 농촌의원들을 설득하는 데도 실패했다. 정부가 두차례 비준안 처리가 무산된 후 제시한 것이라고는 일부 예산을 앞당겨 투입하는 내용의 보완책이거나 "비준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국가신인도가 나빠진다"는 홍보논리를 개발하는 게 고작이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재창 기자 lee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