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진 월북해 김일성대학에 자리잡은 김석형(金錫亨.1915∼1996)은 1963년 이른바 '삼한 분국설'을 주창하고 나선다. 그해 「력사과학」 1집에 발표된 그의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에 대하여'라는 논문은 1966년「초기조일관계사」라는 방대한 저서로 체계화한다. 삼한 분국설이란 한반도 삼한사람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열도 각국에 일종의 식민지라고 할 수 있는 분국(分國)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견해가 당시 일본학계에서 미친 충격파는 논문 발표 직후 이를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하타다 다케시가 붙인 논평이 "파천황"이라는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종래 일본학계가 주창하던 임나일본부설을 완전히 뒤집은 것으로 한반도인들이 고대일본을 건설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김석형이 내세운 근거는 많으나, 일본 덴리시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전하고 있는 칠지도(七支刀)라는 쇠칼에서 확인되는 명문 60여 글자도 가장 중요한 자료였다. 1870년대에 명문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일본학계에서는 이 칠지도(七支刀)가 바로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백제가 왜 왕실에 '헌상'한 '칠지도'(七枝刀)이며, 이는 백제의 왜에 대한 복속을 말하는 제1 증거물로 확실시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남북한에서는 반론은 물론이고 이렇다 할 연구도 없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석형은 대담하게도 칠지도는 백제 왕세자가 후왕(侯王.제후왕)인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약 40년이 흐른 지금, 그의 삼한 분국설은 상당 부분 파기되거나 수정되었다. 하지만 그의 논문은 남북한 역사학계가 광개토왕비문과 함께 칠지도를 앞세운 일본학계의 한국고대사에 대한 일방적인 '폭력'(즉, 임나일본부설)을 벗어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자신감을 심어줬다는 점에서 그것이 갖는 의미는 실로 크다. 이를 가장 뚜렷하게 증명하는 대목이 김석형 논문을 시발로 칠지도에 대한 남북한 역사학계의 연구가 폭증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김석형은 과연 무엇 때문에 삼한 분국설을 들고 나왔을까? 김석형은 1966년 「초기조일관계사 연구」에서 임나일본부(미마나 미야케)설을 "귀신 단지 속에 나와 '합리주의'의 외피를 쓰게" 된 학설이라고 혹평하면서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8.15 후 일본 역사학계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는 다른 부면에서는 상당히 대담하게 고쳐졌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있으나 초기 한일 관계 서술의 중심 문제에 이르러서는 달라진 것이 없다. 재생된 일본 군국주의의 남한 재침 기도와 관련하여 '미마나' 설이 제국주의자들의 총애를 받게 될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일본 군국주의의 남한 재침 기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책이 출간된 1966년은 한일국교정상화(1965년) 이듬해이며, 문제의 논문이 나온 1963년은 이를 위한 한일 외교협상이 막바지로 치닫던 때였음을 주목해야 한다. 김석형이 말하는 일본의 '남한 재침 기도'는 바로 이것이었다. 요컨대 일본에서 칠지도가 일본제국의 민족적 영광의 표상이었듯이 김석형 이후 남북한에서 칠지도는 백제가 왜 왕실에 하사한 것으로 간주됨으로써 거꾸로 일본에 대한 민족적 우월성을 확인케 하는 증거물이었다. 이런 점에서 칠지도가 구축한 한일고대사는 이성시 일본 와세다대 교수가 말한 대로 "우리가 아는 고대의 역사는 근대 국민국가 욕망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나라=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