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박과장,김 박사는 오늘도 소식 없어?" "예.이상한데요.집에도 연락이 안돼요" 지난해 8월 국내 LCD모니터 제조업체 Z사의 연구실장 A씨는 며칠 전부터 회사에 나오지 않고 있는 연구원 때문에 애를 태우고 있었다. 제조공정을 비롯한 핵심 기술자료를 모조리 알고 있던 엘리트 연구원인 김 박사가 사직서 한 장만 달랑 남긴 채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시간,김 박사는 왕씨 성을 가진 중국인 사업가와 베이징 등을 오가며 합작기업 설립을 협의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무려 2기가 분량의 기술자료들이 들려 있었다. 김 박사는 "거액의 스톡옵션을 줄테니 당신이 갖고 있는 기술로 중국에 공장을 만들자"는 왕 사장의 제의에 넘어가 동료 연구원까지 은밀하게 규합해놓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사직을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한 것이 김 박사의 '불찰'이었다.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고 여긴 Z사가 모종의 조치를 취하면서 김 박사는 사법당국에 걸렸다. 지난해 8월 F사의 핸즈프리 제작기술 유출사건도 비슷한 양상으로 벌어졌다. 당시 F사는 외국계 M사와 합작법인 설립을 추진하던 중 제품개발 담당 연구원 2명이 사라지는 경우를 당했다. 합작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M사에 매수당한 것이었다. 연구원들은 우편으로 회사에 사직서를 송부한 뒤 핵심기술이 저장된 노트북을 소지한 채 해외로 나가버렸다. F사는 발을 동동 굴렀지만 이미 핵심기술 자료와 시제품은 M사에 건네진 뒤였다. 당연히 합작은 무산됐다. 이들 사건을 연구원 개인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유사한 사례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연구원들에 대한 기업들의 체계적인 인력관리 프로그램이 빈약하다는 점이 문제다. 중견 연구원들에게 임원급 대우를 해주는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중소·벤처기업에 종사하는 연구원들은 이직률이 무척 높은 편이다. 사회 전반의 이공계 '푸대접'분위기와 맞물려 '몸값을 올리기 위해' 직장을 옮기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렇다 보니 전 직장에서 습득한 기술이나 기밀을 유출하는 데 '죄의식'을 별로 갖지 않는다고 한다. 국가정보원 관계자는 "사건이 불거져 당사자들을 붙잡아보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항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씁쓸해했다. 지난 2001년 발생한 정부출연기관 연구소 내 '산삼 세근 대량배양기술' 유출사건은 국내 약용식물 분야에서 최고 권위를 갖고 있던 연구원이 연루돼 일대 충격파를 안겨다 주었다. 이 연구원은 미국 기업에 50억원을 받고 기술을 넘겨주려다 국정원에 적발됐다. 이미 일부 기술은 넘어가 현금 10억원이 오간 상태였다. 당시 사건을 조사했던 국정원 관계자는 "정부로서는 기술뿐 아니라 국책연구소의 동량역할을 하던 국가적 인재도 놓친 셈"이라며 "개인의 자질은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