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蔣介石) 고(故) 대만 총통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 여사가 24일 오전 6시17분(한국시간) 1백6세를 일기로 미국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파란많은 삶을 마감했다. 1898년 3월25일 광둥성 원창(현재는 하이난성)에서 태어난 그는 기독교 신문명에 일찍 눈을 뜬 아버지의 도움으로 1910년 11세의 어린 나이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서 웨슬리대를 졸업한 그는 10년만에 귀국해 기독교 활동 등 각종 사회활동 경험을 쌓았다. 그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 사건은 장제스 총통과의 결혼이었다. 당시 황포군관학교 교장이자 국민당군 실세였던 장 전 총통은 아이 셋 딸린 유부남이었는데 그녀는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7년 결혼을 강행했다. 이후 쑹 여사는 장 전 총통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면서 그의 개인비서 겸 외교고문으로 발군의 재능을 발휘했다. 특히 1930년대 일제의 중국 침략이 시작된 뒤 중국 입장을 전 세계에 알리는 외교관이자 대변인으로 명성을 얻었고,시안사변으로 남편이 군벌 장쉐량에게 감금됐을 때는 신변 위협을 무릅쓰고 직접 시안으로 날아가 담판으로 남편을 구출하기도 했다. 그는 43년 카이로 회담에도 참석,남편의 통역을 맡는 등 국제적 인물로 부상했다. 49년 대륙에서 공산 혁명이 성공한 후 정치·사회 활동을 자제해 오던 쑹 여사는 74년 남편이 사망하자 병 치료차 도미,대만과 미국간 외교 강화를 위해 주력했다. 쑹 여사는 두 언니 쑹아이링(宋靄齡)·쑹칭링(宋慶齡)과 함께 유명한 '쑹씨 세 자매'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쑹아이링은 산시성 최대 금융부호였던 쿵샹시(孔祥熙)와 결혼했으며 쑹칭링은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孫文)과 결혼했다. 이들 세 자매의 화려한 혼맥(婚脈)을 빗대어 "첫째는 돈,둘째는 중국,셋째는 권력과 결혼했다"는 비유가 한동안 유행했었다. 그러나 장 전 총통을 극도로 싫어하고 공산당에 우호적이었던 언니 쑹칭링과는 심각한 갈등을 빚기도 했다. 쑹 여사는 자신이 낳은 후손이 없다. 장징궈(蔣經國) 전 총통과 그의 동생인 장웨이궈(蔣緯國)가 고 장제스 총통의 아들이지만 모두 그의 친생 아들이 아니다. 호적상 1899년생인 쑹 여사는 3세기에 걸쳐 청조(淸朝)와 민국시대,대만 현대사 등 3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쑹 여사가 1백세를 훨씬 넘길 정도로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마음의 평정을 중시하고 대외 활동을 최소화하는 도교식 생활습관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쑹 여사는 대만에 있는 남편 묘에 합장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측근들이 몇 년 전 뉴욕에 묘지를 마련해 놓았다고 대만 중국시보는 전했다. 베이징=오광진 특파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