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말 뉴욕 증권시장에서는 '개념주(concept stock)'란 신조어가 등장했었다. '신(新)경제' 붐을 업고 '묻지마' 투자열기를 모았던 닷컴 주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기업 가치나 성장성은 확실하지 않지만 사두면 뭔가 돈이 될 것 같다는 '감(感)'이 이들 주식의 인기몰이 배경이었으니,작명(作名) 치곤 절묘했다. 하지만 잔뜩 부풀었던 거품의 붕괴와 함께 닷컴 주식에 대한 개념은 환상이었음이 이내 드러났다.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선언'을 지켜보면서 몇년 전 뉴욕 증시에서 벌어졌던 '개념주 소동'을 떠올리는 마음은 착잡하다. 지난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는 '기존 정치질서에 대한 변혁'을 기대하는 다수 유권자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승리했다. 그에게 몰렸던 49% 남짓한 지지표 가운데 미국 증시에서의 '개념주'와 같은 거품성 인기가 얼마나 녹아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적어도 당선 이후의 상황에서는 몇가지 공통점이 나타난다. 우선 급격한 지지율 하락이 그렇다. 집권 초 여론조사에서는 80% 가까이까지 솟구쳤던 지지율이 몇 달 지나지 않아 하락세로 돌아서더니 최근에는 20%대를 헤맨다. 지지율이 이처럼 급전직하한 원인도 개념주 파동과 비슷하다. 기득권층을 끌어안는 설득력있는 개혁,과거 집권세력과 구분되는 도덕성을 기대했던 지지자들은 노 대통령 집권 이후 오히려 심화된 계층·이념·세대간 갈등과 잇단 권력형 스캔들에 고개를 돌리고 있다. 당선 소감 일성으로 "저를 반대했던 분들을 포함한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던 다짐은 집권 8개월도 안돼 자신을 당선시킨 집권당마저 반으로 쪼개버리는 극단적인 '뺄셈의 정치'로 희화화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노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유권자들에게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한 걸 어떻게 봐야 할까. 개념주에 손을 댔다가 돈을 날리곤 '판단 잘못'을 통탄하는 주식 투자자처럼,혹여라도 그를 지지했다가 후회하는 유권자들에게 손절매(損切賣)라도 할 기회를 줬으니 잘했다고 해야 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재신임 투표를 증시에서의 손절매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증시에서라면 잘못 산 주식을 밑지고라도 팔아 다른 유망 주식으로 바꿔치면 그만이지만,현직 대통령에 대한 재신임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현직 대통령에게 계속 국정을 맡기는 게 낫겠는가,아니면 재선거 등의 복잡한 절차를 무릅쓰고라도 갈아치우겠느냐를 묻는 재신임은 투표의 선택지(選擇枝)에서부터 엄청난 차이가 난다. 설령 지금의 대통령이 못마땅하더라도,야당에서 마땅한 대권 주자가 떠올라 있지 않은 상태에서 '대안 없는 반대'를 불안해하는 게 많은 국민들의 심리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노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25%를 맴돌면서도 '재신임하겠다'는 유권자 비율이 50%를 넘나들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노 대통령이 재신임을 통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도 요령부득이다. 엊그제 국회 시정연설에서 부동산 공개념 도입과 강력한 노사관계 혁신 추진 등을 향후 주요 국정 과제로 제시했지만,그런것들이 꼭 재신임 투표를 통한 '허수'의 재충전을 받아야만 가능한건지 의문이다. 혹시라도 노 대통령이 밝힌대로 '국회의 발목 잡기'를 '정면돌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재신임투표를 동원하겠다는 것이라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그가 선거를 통해 집권했듯이,국회 역시 선거를 통한 민의의 결과로 구성된 3권 분립의 중요한 축이다. 헌법에 규정된 국회의 행정 견제조치를 인정할 수 없어 위헌 논란조차 일고 있는 재신임 국민투표를 강행하겠다는 것은 쿠데타적 발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도대체 대통령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