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06.04.04 03:42
수정2006.04.04 03:47
현대 계열사에 대한 잇단 주식매입으로 관심을 모았던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는 현대그룹을 직접 관리하겠다는 뜻으로 여겨지는 '섭정(攝政)'이라는 표현을 썼다.
고 정몽헌 회장의 빈 자리를 스스로 메우겠다는 의지로 해석되며 실제 정 명예회장은 이미 주요 계열사에 대한 경영정상화 방안 수립에 착수했다.
이로써 현대그룹의 경영체제는 정 명예회장과 KCC로 중심축이 완전히 이동할 전망이다.
정 명예회장은 특히 자신이 직접 선택하게될 '회장급 경영인'을 통해 사장단 인사를 비롯 실질적인 경영권을 행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재까지 털어 넣겠다"
정 명예회장은 현대그룹의 경영권이 도전받는 상황이 오면 "보유하고 있는 KCC 지분을 팔아서라도 현대계열 지분을 사들이겠다"며 "사재를 포함해 총 3백억원의 현금을 마련해놓은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이같은 주식 매입이 현대그룹을 KCC계열로 편입하려는 의도로 해석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정 명예회장은 "내가 현대를 인수하려 한다는 항간의 소문은 악의적인 것"이라며 "외부세력으로부터 현대그룹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때 이르게 유명을 달리한 조카(고 정 회장)과 돌아가신 큰 형님(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최근 측근들에게 "얼마 전 몽헌이가 찾아와 '부하 임원들에게는 골프채를 사주시면서 왜 제게는 주시지 않느냐'고 농담을 건네던 모습이 아련하다"고 떠올리며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현대그룹 전면 재편될 듯
정 명예회장이 현대를 관리할 전문경영인을 찾겠다는 입장을 밝힘에 따라 현대 계열사에는 대대적인 인사태풍이 불어닥칠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성과 충성심을 겸비한 전문경영인은 자리를 지키겠지만 과거 현대 부실에 책임이 있는 인사들은 '문책'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과거 다른 기업들을 인수할 때 나타났던 현대 특유의 스타일을 감안하면 대폭적인 물갈이가 이뤄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인사뿐만 아니라 기존 현대그룹의 경영스타일도 대거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과거 현대그룹은 구조조정본부의 강력한 통제 아래 계열사들의 투자나 출자를 규제해왔다.
대북사업을 위한 무리한 투자도 이 과정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정 명예회장은 그동안 이같은 의사결정 시스템에 크게 불만을 표시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정 명예회장은 향후 현대그룹을 엘리베이터·상선·택배 3개사 위주로 끌고간다는 점을 분명히 한 반면 현대아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현대아산의 대북사업과는 분명히 선을 긋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정 명예회장은 또 "상선 엘리베이터 택배 3개사를 중점 육성해 현대그룹의 간판 기업들로 키우는 대신 나머지 계열사들은 단계적으로 처분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현대그룹의 세부적인 경영사안에 대해 간섭하지는 않겠지만 대북송금이나 분식회계처럼 불법·탈법적인 일이 일어난다면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KCC와 현대는 별개"
정 명예회장은 그러나 KCC가 현대계열의 사업에 투자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각자 독립된 영역에서 사업을 해나가겠다는 설명이다.
그는 "KCC는 지난해 6천억원의 설비투자를 단행한 만큼 당장 다른 기업에 관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며 "현대 계열사 정상화방안은 내가 따로 마련하지만 그것이 KCC측 자금을 동원하는 방식은 결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