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었던 증권집단소송제 도입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 자산규모 2조원 이상의 기업을 그 적용대상으로 하는 '증권집단소송법'이 지난 7월 23일 국회 법사위 법안심사소위에서 통과했고, 8월 임시국회에서 동법안의 제정을 서두르고 있다. 2년 전 김대중정부 시절 집단소송제가 논의될 당시부터 필자는 집단소송제가 소액주주권의 보호라는 취지를 현실적으로는 살리기 힘들다는 주장을 해왔다. 그 논지를 요약하자면,집단소송제는 '승소하면 엄청난 보상을 받고,패소하더라도 본전'인 유인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기업에 불리한 제도이고,법원의 최종판결과 무관하게 일단 피소된다는 그 자체만으로 범법자 취급을 받는 한국적 풍토에서는 더더구나 남용의 우려가 심각한 제도라는 것이다. 오죽하면,일본은 집단소송제의 도입 검토에 10년의 세월을 보내고도 도입을 유보하기로 했으며,미국의 경우는 집단소송 남소로 인한 피해가 심각해서 소송요건을 강화하는 장치를 도입했겠는가? 외국의 사례와 한국적 현실을 모두 보더라도 집단소송제는 아직 시기상조임이 분명한데,정부가 이 제도의 도입을 추진하는 이유는 현 정권 지지세력들의 막연한 반기업정서를 등에 업고,기업을 벌벌 떨게 만드는 것이 개혁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증권집단소송이 아니라도 주가조작을 방지하거나 이로 인한 피해를 방지할 수 있는 제도는 많다. 증권범죄는 금융감독위원회와 검찰에서 적발해 처벌하며,그 피해는 민사소송 외에 선정당사자 제도를 통해 다수가 한꺼번에 입을 피해를 배상받을 수 있다. 그런데 왜 집단소송제를 도입해야 하는가? 소위를 통과한 후,여야 정책협의에서 자산 2조원 이상의 기업으로 그 대상을 제한한다고 하는데,그 안이한 법 인식에 의아할 따름이다. 그간의 경험과 이론을 굳이 동원하지 않더라도 자산규모가 큰 기업일수록 시장에서의 감시·견제장치들이 더 잘 작동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집단소송제는 대기업을 손봐야 한다는 운동권 논리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소수주주들이 입은 피해구제나 불법행위 예방만큼 중요한 것은 불법행위를 하지 않은 선량한 기업이 이러한 제도 때문에 불의의 피해를 입거나,원고를 제외한 다른 주주들이 입을 수 있는 피해를 예방하는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기업들이 평소에 투명하게 운영하면 뭐가 문제가 되느냐고? 공업용 우지 사용으로 89년 검찰에 기소됐던 삼양식품은 7년 후에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회사는 화의결정으로 이미 사실상 회복불가능한 상태에 빠진 뒤였다. 98년 골뱅이 통조림에 포르말린이 첨가됐다는 이유로 기소된 통조림 회사들은 2001년 대법원에서 무죄로 확정됐으나,기소에 따른 파장으로 매출이 격감해 많은 회사들이 도산했다. 증권불법행위를 혐의로 기업이 거액의 송사에 말려들면 그 내용의 진위에 관계없이 송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주가 폭락, 이미지 훼손 등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을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이번에 법사위 소위를 통과한 법안에 규정된 내용으로는 남소 가능성이 여전히 높다. 지분율 0.01%나 시가액으로 원고 50인이 1억원 이상 소유하면 소송이 가능하게 돼 있는데, 예컨대 1인당 2백만원의 주식을 보유한 사람 50인만 모으면 어떤 기업이든지 제소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라.소송을 주도하는 주주들의 대표성을 높이고,불법행위가 확인된 후 소송을 하도록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대표소송제기권 수준인 지분율을 상향조정하고 1억원 조항은 삭제해야 한다. 또한 금융감독위원회에서 증권범죄를 상시적으로 조사해 제재를 하므로 소송은 금감위의 조사가 끝난 사건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울러 원고는 소송에서 지더라도 잃을 게 없는데 비해 피고 기업은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 있으므로 공탁금제도의 도입을 고려해봄 직하다. 남소방지책이 없는 집단소송제는 날카로운 칼을 솜씨가 서투른 사람에게 쥐어 주는 것과 같다.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