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순간(the Moment of Truth)'이란 말이 있다. 스페인의 마케팅이론가 리처드 노먼 교수가 제창한 개념이다. 어떤 일에 있어 가장 중요한,결정적인 순간을 뜻한다. 원래는 투우에서 쓰는 용어다. 투우사가 황소를 데리고 재주를 부리다 마지막에 칼을 들어 황소의 정수리를 찌르는 때를 이렇게 부른다. 스페인말로는 'Moment De La Verdad'라고 한다. 승부는 여기에서 결정난다. 이 용어는 골프교습서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골프 스윙에서 진실의 순간은 공과 골프 클럽이 직각으로 만나는 바로 그 찰나다. 그 이전의 준비가 아무리 그럴 듯 했어도 공이 빗맞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반대로 이전 동작들은 엉터리였어도 이 진실의 순간에 제대로 맞히기만 한다면 공은 똑바로 날아간다. 진실의 순간은 우리 생활 곳곳에 있다. 하루 수면을 3∼4시간으로 줄여가며 1년을 공부한 고3 수험생도 수능시험 당일 컨디션이 나빠 시험을 망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스무번의 슛을 했어도 골인시키지 못하면 축구는 이길 수 없는 법이다. 기업에서 '진실의 순간'은 언제인가. 바로 직원들이 고객을 만날 때다. 노먼 교수의 말을 빌리면 '고객이 광고를 볼 때,주차장에 차를 세울 때,회사 로비에 들어설 때,우편으로 받은 청구서를 처음 읽을 때'가 바로 진실의 순간이다. 이때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물건이 팔리고 평생 단골이 생긴다. 반대로 이때 고객의 눈 밖에 나면 물건은 팔리지 않고 판매 기회를 경쟁사에 뺏기게 된다. 마케팅 용어로서 '진실의 순간'이 중요한 것은 이 개념이 곱셈의 규칙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고객은 서비스를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는 얘기다. 한번 0점이나 마이너스(-) 점수를 받게 되면 여하한 노력으로도 만회가 어렵다는 뜻이다. 이 개념을 제대로 활용해 성공한 경영자가 있다. 지난 80년대 스칸디나비아항공(SAS) 사장이던 얀 칼슨이 주인공이다. 그는 70년대 말 오일쇼크로 2년 연속 적자를 기록한 이 회사에 81년 39세의 나이로 사장이 됐다. 그는 부임하자 마자 직원들이 고객을 만나는 15초 동안이 '진실의 순간'이라고 일갈했다. 이 15초 동안에 고객을 평생 단골로 잡느냐 원수로 만드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기내식 식반이 지저분하면 승객들은 비행기 전체가 불결하다고 느낀다"며 식반 닦는 종업원들에게도 '진실의 순간'을 직접 강조할 정도로 전사적 운동을 벌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8백만달러 적자였던 경영수지가 1년 만에 7천1백만달러 흑자로 바뀌었다. 에너지를 쓸데없는 데 소비하지 않고 결정적인 부분에 집중한 결과였다. 새 정부가 출범한 올해가 절반이 지나간 지금까지 사회 곳곳에서 유난히 '헛발질'이 많다고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경제주체들이 '진실의 순간'을 도외시한 채 명분 싸움과 힘겨루기에만 매달린 결과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진실의 순간'은 바로 모든 이들의 살림살이와 관련돼있다. 수출이 많아지고 고용이 늘며 물가가 안정되고 외자가 밀려들어오는 순간이 필요하다. 지금은 경제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야 진실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진실의 순간 앞에서는 명분도 역사의식도 집단이기주의도 잠시 접을 수 있어야 한다. 진실의 순간을 놓쳐 경제를 살리지 못하면 누구라도 그 책임에서 예외일 수 없다. 정부도 재계도 노동자도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노동자들은 분규를 자제할 수 있어야 하고 기업주들도 거리로 나서려는 노동자들의 바지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질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진실의 순간'은 그야말로 찰나이기 때문이다. 경영전문기자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