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생활은 향긋하다. 문명의 소음들은 산들바람과 계곡물소리에 파묻힌다. 사람들간의 '새빨간' 반목과 대립도 '누런' 황토와 '푸른'들녘 풍경에 중화된다. 담백한 일상은 순박한 인심을 낳아 기른다. 이민용 감독의 '보리울의 여름'(제작 MP엔터테인먼트)은 전원에서 들려주는 화합과 희망의 찬가다. 스님과 신부,보수와 진보,계율과 자유,고아와 부모 있는 아이,촌놈과 도회인들이 어우러져 내는 판소리 한바탕이다. '불 좀 꺼주세요''돌아서서 떠나라' 등의 희곡작가이면서 영화 '약속'의 시나리오를 썼던 작가 이만희씨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맡아 사건보다는 인물들간의 관계변화 탐구에 주력한다. 두드러진 주역과 선명한 갈등을 내세운 일반 상업영화의 문법을 따르지 않고 엇비슷한 비중의 캐릭터들이 갖는 마찰을 불쏘시개 삼아 훈훈한 감동을 지핀다. 바늘끝을 불허할 정도로 깐깐하지만 TV연속극을 보면 눈물을 글썽거리는 원장수녀(장미희),그녀와 말다툼한 뒤 가출하는 신부(차인표),원장수녀의 핀잔을 넉살 좋게 받아넘기는 스님(박영규). 갈등의 중심은 종교문제가 아니라 원장수녀의 지나치게 완고하고 엄숙한 태도다. 그러나 갈등의 골은 그리 깊지 않으며 오히려 웃음을 낳는 촉매제다. 보리울이란 가상 농촌마을이 배경이지만 농민 대신 스님과 신부 수녀 어린이들을 주요 캐릭터로 내세웠다. 또 축구란 소재를 전면에 배치하고 농촌의 삶을 후면으로 빼돌렸다. 이 때문에 대다수 도시의 관객들은 바로 자신들의 여름방학 이야기처럼 친숙하게 받아들인다. 이 영화에서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도구는 농촌생활과 축구다. 축구는 어린이와 어른,스님과 신부,고아들과 가정있는 아이들간의 장벽을 허물고 한팀으로 묶어준다. 출가한 스님아버지와 그를 찾은 자식간의 괴리도 좁혀준다. 축구는 스님과 신부,스님과 수녀,절팀과 성당팀의 아이들간에 화학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소박하고 담백한 농촌의 일상에서 따스한 인간본심을 회복한다. 차인표는 단정하고 건강하며 개방적인 김신부 역을 형상화했다. 그가 지금까지 맡은 캐릭터 중 가장 어울리는 배역일 듯 싶다. 장미희는 깐깐한 태도 아래 연약한 심성을 감춘 캐릭터를 연기했다. 그녀의 출연작 중 이야기 흐름에 영향을 가장 적게 끼친 배역일 것이다. 겉으로는 화통하고 익살스럽지만 속내가 깊은 우남스님 역의 박영규는 두 사람의 연결고리역할이다. 아역들의 비중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동숙(배종은)을 주축으로 한 축구팀결성,스님아들과 동네 여자아이와의 풋사랑 등도 잔재미를 보태준다. 여러 배역들에게 시선을 고루 던지는 연출기법은 농촌생활에서 각자가 자신의 무게를 감당하면서 서로 도와야 한다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스님과 신부의 화합은 상대 종교를 존중하는 태도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아름다운 시골풍경과 이영훈이 맡은 영화음악도 순화된 심성과 어우러진다. 25일 개봉. 전체 관람가.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