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전 관련 기사로 가득 찬 신문 한쪽에 가슴 미어지는 뉴스 두 가지가 실렸다. 97년 KAL기 괌 추락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보상금에 사재를 더해 아들의 모교에 거액의 장학기금을 내놨다는 것과 아내와 아이들을 미국에 두고 혼자 살던 기러기아빠가 숨진 채 발견됐다는 내용이다. 콧등이 시큰해지고 온몸의 맥이 풀리면서 언젠가 들은 얘기가 떠올랐다. "네살 짜리 아들이 청력을 잃었다는 걸 알았을 땐 앞이 캄캄했지요. 마음을 다잡긴 했지만 하늘이 원망스러웠던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고등학교에 다니던 중 다쳐 사경을 헤매자 청각장애는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그저 살려만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제대로 듣지 못하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10여년 간 저녁 약속을 하지 않고 아들이 아프자 "살려만 달라"고 기도했다는 아버지.부모의 마음은 다 이럴진대 다 키운 자식을 먼저 보낸 사람의 심정은 누구도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남들 앞에서 대놓고 울기도 힘들었을 아버지임에랴.예기치 못한 불행을 당하면 거부와 분노에 매이는 사람, 고통을 남에게 전가하는 사람,극복하고 베푸는 사람으로 나뉜다지만 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잃은 아버지가 보상금 전액을 내놓았다는 건 부정(父情)의 뜨거운 힘을 새삼 일깨운다. 그런가 하면 기러기아빠의 사망소식은 자식을 위해 자신의 삶은 팽개치다시피 하고 사는 이땅 많은 아버지들의 아픔을 전한다. 2001년말 현재 조기유학생은 7천9백44명으로 99년보다 4배 이상 늘었다고 하거니와 통계를 들먹일 것도 없이 자식만은 제대로 가르쳐 보겠다고 아내마저 보낸 채 혼자 텅빈 집에 사는 아버지가 수두룩하다. 부부별거는 배우자 사망과 이혼 다음으로 큰 스트레스라는 말이 아니라도 겉으론 태연한 척 하지만 집에 돌아와봤자 말 한마디 건넬 사람 없는 기러기아빠의 외로움과 불안 걱정은 가늠하기 어렵다. 뿐이랴. 밤낮 없는 고생을 자식들에게 이해받지 못해도 내색조차 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정은 진정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인 모양이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