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토론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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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시절엔 브리핑이 크게 각광을 받았었다.
복잡한 사안을 일목요연하게 차트를 만들어 설명하는 브리핑은 군사문화의 하나라고는 하지만, 최고 정책결정권자를 쉽게 이해시키는 데는 그만이었다.
박 대통령의 취향이 감안됐겠지만 브리핑을 잘해야 출세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여서 공무원들은 브리핑기법 개발에 온 힘을 쏟곤 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토론'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토론공화국을 주창하고 나선 노 대통령이 평검사들과 검찰개혁문제에 대해 난상토론을 벌인 이후에는 사회 전반에 걸쳐 토론이 급속히 확산되는 것 같다.
특히 정부 부처 공무원들은 보고도 토론형식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생소한 토론문화를 익히느라 안간힘을 쏟고 있다고 들린다.
'말 못하면 낙오'라는 인식이 심화되면서 '토론달인'이 되자며 대학들이 개설한 스피치과정을 수강하는 공무원이 크게 늘고 있다고도 한다.
불과 얼마전까지 몇 사람의 수직적 결재라인에서 이루어진 정책결정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든다.
그렇다고 토론이 만능은 아니다.
토론은 최선의 판단을 도출하고자 하는 것인데 자칫 자기 주장만 하고 집단이익만을 고집할 때 갈등이 심화될 조짐이 없지 않아서다.
이해가 상충되는 현안일수록 합리적 사고가 우선돼야 함에도 목소리 큰 사람이 토론분위기를 주도하거나 집단적 사고가 우선될 개연성이 높다.
조선시대의 당쟁은 집단적 사고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단적인 예일 것이다.
토론은 자칫 말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이는 큰 오산이다.
합당한 논리로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윗사람의 명령에 따라 피동적으로 움직여 온 우리 사회에서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게다.
그리스시대의 소피스트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변론술과 수사학을 최대한 동원했다.
오로지 논쟁에서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궤변가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궤변이 아닌 건전한 토론문화가 우리 사회에 정착되기 위해서는 다소간의 시간은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