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이라고는 달리기밖에 모르던 내가 지금 '운동'중이다. 신체 단련이 아니라 일종의 캠페인을 말하는데,이름하여 '에코 캠퍼스'운동이 요즈음의 내 주종목인 것이다. 내가 일하는 학교에 예쁘고 고풍스런, 건물이라기보다는 집이 하나 있었다. 40년 된 작은 돌집이지만 1백년 가까이 된 옛 건물들과 곧잘 어울려 전통의 분위기를 뿜어내는 바람에 사람들에겐 그것이 아주 오래된 건축물처럼 여겨졌었다. 새가 모여들고,나무들이 이 모양 저 모양 잎을 드리우고,햇살까지 경쟁하듯 그 틈으로 파고들 때면,돌집이 위치한 2백평 남짓의 공간은 한마디로 낙원의 동산을 방불케 했으니,실제로 그곳은 근처에서 지내는 우리 모두에게 휴식과 사랑과 수면의 장소이기도 했다. 하필이면 그곳을 허물고 수천평짜리 최신식 건물을 짓는다고 해,그곳은 그대로 보존하고 다른 좋은 곳에 발전과 문명의 상징이 될 새 건물 자리를 찾아보자고 했다. 그런데 다른 곳은 찾아볼 생각도 없이 굳이 그곳을 파헤치겠다고 했다. 어떻게든 철거를 막아보려고,철거단이 들어오면 머리띠라도 두르고 누워있어야지 했는데,한밤중에 포크레인이 들어와 집을 허물고 갔다. 계획된 공사의 정해진 수순이었다고 하지만,그건 폭력적인 살해나 다름없었다. 기습적인 철거 이전에 대화와 설득의 합의 노력이 있었어야만 했고,부득이 철거하기로 했다면 그동안 우리에게 봉사해온 옛집과 옛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었어야만 했다. 또 우선 철거로 공사를 기정사실화하고자 했더라도,과연 그곳이 계획된 대형 건물에 합당한 부지인지,과연 그것이 최선책인지에 대한 이성적인 고려가 따라야만 했다. 지키려던 옛터를 잃었으니 내가 참여했던 '에코 캠퍼스'운동은 이미 '진 게임'이 돼 버렸는지도 모른다. 세상 사는데 무슨 이기고 지는 일이 있겠냐마는(더군다나 학교에서),그렇게들 쉽게 말하니 나도 따라 하는 말인데,실은 마구 부수고 해치우는 개발을 '이긴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참으로 문제는 문제다. 아무튼,기왕에 무너진 집이니 다시 지어야 할 것이고,그렇다면 계획대로의 건물을 짓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쉬운 일일 것이다. 이제 2백평 집이 서 있던 곳엔 3천평의 높은 건물이 들어찰 것이고,새와 나무의 빈터를 수백대의 자동차가 차지할 것이며,학문의 고유 성격과 관계없는 이종의 집단과 활동이 몰려들 것이다. 그래서 난 요즘 '진 게임'을 어떻게 '이기는 게임'으로 뒤바꿀 수 있는지,아니면 질 것이 뻔한 게임이나 하고 있는 이 멍청한 나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골몰하고 있다. 사실 '에코 캠퍼스'는 비단 옛집 한채,나무 한포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그건 대학의 환경이라는,어떻게 보면 매우 추상적일 수도 있는 이슈가 담긴 문제이고,거기엔 유형의 보존물뿐만 아니라 전통,기억,미학,정신의 가치와 같은 보다 깊고 소중한 무형물의 생존권에 대한 의식이 담겨져 있다. 대학이라면,대학인이라면,최소한 그 사실에 있어서 만큼은 이견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대학은 당장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의 편리(혹은 생존권)를 위해 더 큰 것들의 생존권을 함부로 희생해도 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대학이라는 공간만큼은 물질이나 정신의 두 차원 모두에서 결코 재개발 대상 구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들에 대한 침착한 고려 없이 단순한 발전 논리만 앞세운다든가,개개인의 공명심이나 이기주의,혹은 무관심의 방만 등으로 대학의 정신적인 환경 문제를 뒷전으로 밀어내 버리는 것,이 모든 문제를 전체가 아닌 일부의 사소한 갈등으로 일축해버리는 것- 바로 여기서 난 대학의 죽음을 서둘러 예감한다. 무너진 옛집은 무너지는 대학의 상징에 불과했다. 단순 물량주의와 적자생존의 무조건적 현실 논리,가시적 외형과 수치의 과시만이 중요해진 오늘의 대학이야말로 흔들리는 집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무너진 작은 터를 지키려는 나의 '에코 캠퍼스'운동은 무너지는 대학을 지키기 위한 커다란 움직임의 시작인 것이다. 비웃지들 마시기를! jk100@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