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눈부신 햇살을 이고 있는 녹색의 정원에는 빨간 장미꽃이 만발하다. 행복의 탄성이 쏟아져야 마땅하지만 절망의 그림자가 가로막는다. 화창한 날씨와 아름다운 정원은 오로지 남성만을 위한 장식이다. 가부장제의 세상에서 여성은 언제나 "나"가 아니라 "남"일 뿐이다. 풍경을 향유할 권리가 여성에게는 없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디 아워스"(The Hours)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고뇌는 깊다. 치열했기에 낙담할 수 밖에 없었던 울프의 선택은 우즈강에서의 투신이다. "디 아워스"는 페미니즘 작가 울프를 소재로 여성의 굴레와 실존의 한계를 깊은 사유를 통해 보여주는 수작이다. 울프역의 니콜 키드먼을 비롯,줄리안 무어,메릴 스트립 등 할리우드 최고의 연기파 배우들이 꾸며내는 앙상블이 탁월하다. 마이클 커닝햄의 원작소설을 옮긴 이 작품은 각기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세 여성의 하루를 넘나들면서 세월은 다르지만 닮은꼴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 1923년 영국에서 "댈러웨이부인"을 집필중인 울프(니콜 키드먼),1951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댈러웨이부인"을 읽으며 인생관에 변화를 겪고 있는 만삭의 주부 로라(줄리안 무어),2001년 뉴욕 맨해튼에서 로라의 아들이자 자신의 옛애인 리처드의 문학상 수상축하연을 준비중인 출판인 클래리사(메릴 스트립)의 하루가 긴밀하게 병치된다. "댈러웨이 부인"으로 연결된 세 여성의 일상은 적어도 겉으로는 평온하다. 화창한 날씨와 장미꽃이 만발한 정원을 갖고 있는 집에서 여성들은 남편이나 남자친구들로부터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카메라가 다가설수록 여성들은 상대 남성들로부터 전혀 이해받지 못한채 탈주를 꿈꾸고 있다. 탈주의 방식은 각양각색이다. 울프는 자신과 대화하고,로라는 홀로 호텔방에서 자살을 기도하며,클래리사는 다른 여성과 동성애관계를 갖는다. 소설 "댈러웨이부인"에서 꽃을 사러 나섰던 클래리사처럼 영화속 세주인공의 일상에는 꽃의 이미지가 반복된다. 꽃은 삶의 성찬을 기념하는 장식이다. 가장 아름다워야할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은 생의 원초적 비극성을 한층 부각시키고 있다. 울프의 현대 뉴욕커격인 클래리사의 양성애적인 면모는 울프의 페미니즘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대목이다. 남성에 대한 애정만큼 여성들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전언이다. 울프의 자살도 인생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충고다. 소설 "델라웨이부인"에서 울프는 "누군가 죽는다면 남아 있는 사람들이 삶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될 것"이라고 적었다. 이 영화는 여성의 실존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 보편에 대해서도 숱한 물음을 던진다. 고독은 얼마나 감당하기 힘든지,사람들간의 틈새는 얼마나 깊고 넓은지,죽음과 삶의 경계는 얼마나 가늠하기 어려운지,시간은 한치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윤회하고 마는 것인지... 인공의 매부리코에다 윤기없는 회색머리카락,화장기 없는 모습의 니콜 키드먼은 버지니아 울프를 환생시킨 듯하다. 줄리안 무어와 메릴 스트립이 감성을 조탁해 낸 솜씨를 보는 것도 즐겁다. 21일 개봉,12세 이상.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