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趙光祖를 論하는 민심 .. 김수섭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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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본격적인 정권인수 활동에 들어가자 지식인들 사이에 조선 중종 때 개혁적 정치지도자 조광조(趙光祖)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노 당선자가 개혁적인데다 대통령직 인수위 핵심 멤버의 상당수가 진보성향 소장파 교수로 채워져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는 데 따른 반작용이다.
인수위가 활동에 들어가자마자 뉴스의 초점이 차기 정부의 개혁프로그램에 맞춰지고 있는 것도 우연의 일치는 아닌 것 같다.
34세 새파란 나이의 성균관학자 조광조는 1515년 중종의 부름을 받는다.
그는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인 왕도(王道)를 강조해 중종이 동지로 여길 만큼 신임을 얻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힘있게 개혁을 추진한다.
먼저 이 땅에 이상사회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지방자치 규약인 향약을 실시했다.
이어 학과시험에만 의존하던 과거제도를 인품과 덕행을 함께 판단할 수 있는 현량과로 바꿨다.
고리대금업을 중지시키고 구태의연한 제도와 전통적인 인습도 혁파했다.
하지만 이같은 개혁정치는 너무나 성급하게 실시된 나머지 부작용이 만만찮았다.
향약은 전통과 조화된 지방자치가 아니라 관 주도적 성향을 띠어 민간의 반발을 샀다.
현량과는 조광조와 뜻을 같이 하는 사림의 등용을 촉진시켜 조광조의 개혁방향을 극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급기야 급진적인 개혁에 설땅을 잃은 훈구 세력들이 '조광조가 왕을 넘본다'며 모함하기에 이른다.
중종마저 조광조 일파의 세력확장에 위협을 느껴 그를 유배 보내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그의 개혁정치는 4년 간의 짧은 실험에 그치고 이렇게 실패했다.
훗날 이율곡은 '석담일기'에서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했다"며 안타까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광조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개혁정치가로 꼽히고 있다.
그의 개혁은 실패했지만 후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치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후대 선비들로부터 추앙을 받은 것은 개혁정신을 물려준 것 못지 않게 목숨을 걸고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한 노력에 대한 경의였다.
그러나 현실은 냉엄하다.
조광조의 4년 간 개혁은 그의 사후 20여년 동안 엄청난 역풍을 불러들였다.
결과적으로 조광조는 실패한 정치지도자로 평가되고 오늘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번 대선을 통해 새로운 정치와 변화를 갈구하는 민심을 확인했다.
오늘 조광조를 다시 논하는 것은 최소한의 시행착오로 변화와 개혁을 이뤄낼 방법론을 촉구하는 충정임에 분명하다.
이에 대해 노무현 당선자는 개혁과 쇄신은 "물 흐르 듯 해야 한다"며 속도조절을 요구한 바 있다.
명분 있는 개혁일지라도 분위기가 무르익어야만 힘을 얻게 마련이라는 인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계를 비롯해 상당수 국민들은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학계 연구계 인사들이 인수위에 대거 포진하자 그들의 현실감각에 의문을 제기하며 '낯가림'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럴 때면 생텍쥐페리의 동화 '어린왕자'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어린왕자가 여우에게 '친구가 되는 법'을 묻는다.
여우는 "서로를 길들이는 것"이라고 일러준다.
차기 정부가 '서슬퍼런 개혁' 대신 물 흐르는 듯한 개혁을 추구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서로를 길들이는 시간과 계기가 필요할 것 같다.
soosu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