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요리] 싱싱한 굴에 레몬즙 살짝 '입맛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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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까머리 고교시절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 중 하나가 바로 벚굴이었다.
어스름한 저녁,퇴근길의 샐러리맨들이 서로서로 인간 바람막이가 되어 후루룩 소리를 내며 정신없이 깨 먹던 커다란 석화.
주인의 손놀림과 갖가지 음향효과가 빚어내는 그들만의 만찬은 카바이트 불빛만큼이나 화려하고 인상적이었다.
사춘기를 막 지나 어른 흉내를 내고 싶던 솜털 투성이의 고등학생에게는 최고의 별식처럼 느껴졌다.
찬바람이 불면 굴 껍질이 수북히 쌓인 간이 포장마차가 그리워지지만 요즘은 찾기가 힘들다.
1599년 간행된 "Butler's Diet's Dry dinner"라는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알파벳 "R"자가 들어 있지 않은 달(5,6,7,8월)에는 굴에 독성이 있다".
물론 이 시기의 굴이 산란기 전후이므로 향과 맛이 떨어지고 더운 날씨에 부패하기 쉬운 것은 사실이다.
과학적 근거가 없는 서술이 선입견을 낳았고 이 기간을 집단적 금식기로 만든 셈이다.
냉장과 보관 기술의 발달로 사시사철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과연 제철에 나는 굴과 어깨를 견줄만한 음식이 또 있을까?
풍년명절(서울 은평구 응암3동 동사무소 옆,02-306-8007)=독보적인 황해도 전통 음식점.
10월 이후에는 살이 제법 오른 싱싱한 굴을 이용한 찹쌀 굴솥밥으로 식도락가들의 발길을 잡아끈다.
커다란 돌판 위에 참기름,무채,감자채,찹쌀을 넣어 지은 굴솥밥은 기름과 섞인 굴의 향이 지나치다 싶을 만큼 고소하다.
통깨와 고추,파를 잔뜩 넣어 만든 양념장은 단맛이 도는 심심한 간장 덕에 밥과 비비면 혀에 착착 감긴다.
이 집 돌솥밥의 특징은 감자를 채 썰어 함께 넣고 밥을 짓는다는 점.
무만 넣은 굴밥보다 맛이 훨씬 묵직하고 진하다.
간장게장과 창란젓도 입맛을 돋운다.
무와 고추 그리고 북어만 넣어 끓인 북어국은 칼칼하면서도 시원하다.
잔재주를 부리지 않은 맛이 오히려 손님들의 인정을 받고 있다.
마무리는 누룽지다.
굴과 야채 그리고 참기름에서 배어 나온 맛이 마치 옅은 간을 한 국밥 같다.
오래된 단골들은 물대신 북어국물을 넣어 눌은밥을 불리는데 이 또한 별미다.
정원 순두부(중구 서소문동 유원빌딩 뒤,02-755-7139)=1969년부터 30년 넘게 서소문 샐러리맨들과 함께 한 서민적 분위기의 순두부 집.
찬바람이 불면 손님들의 대부분은 "굴 순두부"를 찾는다.
건더기의 양이 충실해 만족스럽고 얼큰한 고추국물과 궁합이 잘 맞는다.
순두부와 밥 이외에 콩나물,김,고추장을 넣어 비벼먹을 수 있는 대접이 상위에 오르고 멀건 싱건지와 묵은 깻잎 장아찌가 뒤따른다.
일단 굴 순두부 몇 수저로 식욕을 자극하는 것이 수순.
곧바로 장아찌며 싱건지를 맨밥 위에 올려 입에 넣으면 이 집의 실력이 느껴진다.
쫀득한 밥알이 입안 이리저리를 돌며 침샘을 자극한다.
밥 뚝배기의 바닥이 반쯤 드러나면 굴 순두부와 밥을 대접에 넣고 척척 비벼 완성품을 만든다.
벌겋게 비벼진 밥은 맵지 않고 부드럽다.
몇 수저 휘두르다 보면 이내 바닥이 드러난다.
메뉴판에 적혀 있지는 않지만 날 달걀을 주문해 굴 순두부에 빠뜨려 먹으면 훨씬 고소하다.
안동장(을지로3가에서 2가 방향 50m,02-2266-3814)=을지로 인테리어 상가들이 밀집한 2가와 3가 사이에 자리한 60년 전통의 중국 요리 전문점.
이 곳의 인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메뉴가 바로 굴 짬뽕이다.
국물이 옅은 갈색을 띄는 이유는 굴 때문.
알이 그리 굵지는 않지만 꽤 많은 양이 들어 있어 첫인상이 푸짐하다.
야채며,고기 그리고 굴에서 우러나온 육수는 시원하면서도 담백하다.
빨간 국물에 익숙해 있는 분들에게는 심심하고 맨숭맨숭해 보일지 모르지만,고개를 갸웃거리며 국물까지 싹싹 비우고 나면 이 집 굴 짬뽕에 매료된다.
싱싱한 야채들의 아삭거림이 즐겁고 느끼하지 않은 국물이 개운하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고급스러운 육수와 재료에 비해 탄력 없는 면발이 동네 중국집을 연상시킨다는 것.
실력이 모자라면 자칫 씁쓸해지기 쉬운 것이 굴 요리인데,이 집은 달고 시원한 굴의 향미가 육수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 김유진.맛 칼럼니스트.MBC PDshowboo@dreamwiz.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