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억새밭'] 끝없이 출렁이는 섬나라 '은빛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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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나라?'
그 말이 꼭 맞다.
서쪽 수평선 너머에서 밀려온 바람이 기어코 등을 돌리게 만든다.
몸을 움츠려도 숨이 막히고, 귓전에 윙윙대는 소리에 얼이 쏙 빠진다.
대거리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 바람을 눈으로 확인한다.
바짓가랑이 사이로 기세등등하게 달려나간 바람은 늦가을 볕이 하얗게 부서지는 억새무리를 휘감아 눕힌다.
대규모 응원단이 일제히 백기를 흔들며 출렁이는 것 같다.
형체없는 바람은 그렇게 제 존재를 드러낸다.
마치 바람이 없다면 제주도 없다고 강변하는 투다.
제주의 늦가을을 마주한다.
상고대(나무서리) 하얗게 핀 정상의 한라산 자락을 뒤덮고 있는 억새속으로 들어간다.
제주의 겉모습을 가장 효율적으로 볼 수 있는 렌터카 여행이다.
출발점은 95번 서부산업도로변의 그린리조트.
정월대보름 들불놀이로 검게 변하고는 하는 봉긋한 새별오름이 억새로 옷을 갈아 입었다.
바람결을 따라 순간순간 하얗게 변하는 모습이 어린아이 웃는 낯을 대하는 것 같다.
1117번 산록도로로 방향을 잡는다.
길가 경사면에 무리진 억새가 반긴다.
왼편으로 시야가 탁트여 시원하다.
생긴지 1천년이 됐다는 비양도까지 한눈에 잡힌다.
곳곳이 전망포인트.
밤의 경관이 더욱 기막히단다.
밤이면 갈치낚시배가 밝히는 불로 먼바다 한가운데 도시가 생긴다고 한다.
내리막인 데도 오르막처럼 보이는 도깨비 도로를 지나 11번 5.16도로를 따른다.
개월오름 부근에서 1112번도로로 갈아 탄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삼나무길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삼나무가 시간감각을 잊게 한다.
길 전체가 어두컴컴한게 어스름 저녁 밥짓는 연기로 희뿌연 시골마을에 들어선 것 같다.
차에서 내려 무작정 걷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푸근하다.
이 길을 곧장가면 산굼부리.
산굼부리는 백록담과 맞먹는 규모의 분화구로, 특히 주변에 시야가 닿는 데까지 펼쳐진 억새밭이 장관인 곳이다.
산책로가 잘 정비돼 있어 걷기에 편하다.
키 큰 억새 사이에 숨어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 가을 추억을 사진에 담으며 함박웃음을 짓는 이들의 모습이 TV 가족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남원~조천을 남북으로 잇는 남조로도 억새 드라이브코스로 빼놓을수 없다.
우뚝한 한라산을 배경으로 솜구름이 내려앉은 듯한 억새바다를 마음에 담아둘수 있는 곳이 이어져 있다.
남원쪽으로 한참 내려가면 색깔이 달라진다.
노랗게 익은 감귤이 입에 침을 고이게 한다.
성산으로 내달려 일출봉을 보고, 성읍민속마을로 이어지는 1119번 도로에 오른다.
무리지어 흔들리는 억새로 흔들거리는 작은 오름들의 모습이 퍽 이국적이다.
성읍민속마을에서 마을과 마을을 잇는 16번 일주도로를 탄다.
해안을 따라 나 있는 12번 일주도로와는 다른 느낌을 주는 길이다.
감귤나무의 윤기어린 잎새와 노란 감귤이 색다른 감흥을 안겨준다.
그리고 중문에서 치고 올라가는 1100번 도로에 연결되어 있는 1115번 산록도로.
비교적 덜 알려진 억새 드라이브 길이다.
나인브리지골프장 근처에 이르면 갑자기 세상이 환해진다.
크게 휘어지는 아스팔트길 양옆은 그야말로 억새천지.
눈이 부시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에 빛이 우르르 튀어오르는 것 같다.
화산암으로 둘러쳐진 밭에 촘촘한 메밀꽃도 수줍게 한몫 거든다.
지나치는 자동차마다 속도를 늦추고 차창을 내린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느릿하게 걸으며 숨을 들이킨다.
하루 일과를 마친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진다.
억새의 솜털이 점점 더 황금빛으로 빛난다.
그 솜털끝에 매달린 제주의 가을이 점점 더 깊어가고 있다.
제주=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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