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을 다녀오는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착륙하자 이미자씨는 짧아진 내 머리 보다는 예전 헤어스타일이 더 좋았다고 넌지시 말을 건넨다. 지난 엿새동안 말 한마디 없던 '남측의 국민 가수 이미자씨'가 어째 나에게 처음 던진 말이 내 헤어스타일에 관한 것인가. 대연주가들도 공연을 앞두고는 긴장을 하는 것이 상례이긴 하지만,평양공연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정성스럽게 치르고 난 이 원로 가수가 편안한 기분으로 돌아간 것은 그래도 비행기가 우리 땅에 착륙하고 난 후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지난 9월27일 평양에서 열린 이미자 공연은 어떤 측면에서 보아도 감격적인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MBC의 공연팀 제작팀 참관단 모두가 긴장하고 바라본 북한의 관중들은 차분하지만 따뜻한 박수를 보내 주었고,참석했던 북한의 고위층인사들 역시 진솔한 찬사를 금치 않았다. 남에서 가지고 간 장내 PA시스템의 성능이 좋지 않아 가사 전달에 아쉬움이 있었으나 다음에는 가극에서 사용하는 자막을 비추자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언제가 '다음'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래도 가까운 장래에 다음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서로 나누었음에 틀림이 없다. 평안도의 억양이 살짝 섞인 나의 어눌한 말씨를 북한사람들은 거부감 없이 잘 알아 들었으나,우리측 참관단은 북측 안내원들의 말씨를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쓰는 단어가 일부 다른 것 외에도 언어 소통을 위해서는 서로 언어 교육이 필요할 것 같다. 남북 통일이 단순히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불러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구체적인 준비작업이 필요하다. 준비작업은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준비가 잘되면 잘될수록 통일 후에 오는 고통을 줄일 수가 있다. 아시안게임에 북한이 참가하고,남북 군사회담이 열리고,공연단 교류가 잦아지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는 서로 불신의 장벽을 허물 수가 없다. 통일이 된다면 남한이 북한식으로 변하는 것인가,북한이 남한처럼 변하는 것인가? 어느 쪽의 변화가 큰 것일까? 자유경쟁시장경제로 가는 것인가? 북한에도 이미자 같은 대형가수가 나오려면 어려운 여건에서도 자기의 주장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여건이 필요하다.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어 청중을 감동시킬 수 있는 대형가수는 '소년궁전'에서 혹독한 훈련으로 완벽한 기능을 터득하여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북한 교예단의 완벽한 기술은 감탄을 자아내지만 관중에게 감동을 일으키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점이 있다. 이미자씨는 정치지도자의 지원 없이도 혼자서 우리 사회의 어려움을 이겨나가 자기의 경지를 이룩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노래를 부를 수 있다. 북한의 민주주의,남한의 민주주의,모두가 이런 창의적인 사람이 나올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지식기반사회에서 국제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국제경쟁력에 관하여는 논리 자체가 서양식이니 북한의 주체사상이 적응하기 어려운 부문이다. 우리도 세계화와 독자적인 정체성 사이에서 헤매는 문제가 산적해 있다. 월드컵 축구에서 우리 젊은이들은 영국의 훌리건에게,그리고 독일의 파시스트들에게 폐쇄적인 민족주의를 너그럽게 극복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고 세계가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손해만 보고 있는 무능한 사람들이라는 야유가 아니라 새롭게 경쟁력을 갖추어 나가는 '신흥 선진국'이 아닐까 하는,아직은 이른 평가를 하고 있다. 어쩌면 평화적 통일은 양측이 모두 국제경쟁력이 있어야 이루어질 수 있을는 지 모른다. 만약 MBC의 평양공연 근본의도가 남북 평화통일을 촉진하는 데 있었다면 이미자씨의 노래는 이런 목적을 달성하는 데 어떤 다른 수단 보다 감성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공연을 주선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미한 의혹은 우리 사회의 불신을 더욱 키워나가는 것이다. 공연비용은 절감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것이고,왜 이 시점에서 이런 공연을 해야 했던가는 시비 거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무튼 이미자 공연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준 것은 틀림없다. soonhoonbae@kgsm.ka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