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을 앞둔 수해지역 주민들은 조상 뵐 면목이 없어서, 아니면조상 모실 처지가 못돼 되레 추석이 원망스럽다. 보금자리를 잃고 비좁은 컨테이너 속에서나마 차례를 지내려는 집은 그래도 다행이다. 수해에 떠내려간 가족들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유족들과 추석을 앞두고 조상 묘를 떠내려 보내야 했던 후손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무거운 마음들이다. 강원도내에는 16일 현재까지 17명의 실종자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아 가족들을애태우고 있다. 부인(35)과 두딸(7살, 4살)을 한꺼번에 잃은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대동리 염규태(42.2급장애인)씨는 요즘 바닷가나 강가를 헤매고 있으나 아내의 시신은 찾았지만두 딸은 아직 찾지 못했다. 스무살짜리 맏딸을 찾지 못한 윤은노(46.강릉시 강동면 모전리)씨 부부도 요즘넋잃은 사람처럼 매일 인근 동해안 바닷가를 오르내리고 있다. 태풍 `루사'가 휘몰아친 지난달 31일 딸을 잃은 김천시 부항면 희곡리 이건수(60)씨는 실종 보름이 지난 16일에도 부항천을 헤맸다. 이씨는 "집앞으로 급류가 쏟아질 당시 딸 아이와 함께 서있었는데 나만 목숨을 건졌으니 조상님 뵐 면목이 없다"면서 "추석전에 시신이라도 찾아야 할텐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달 10일 김해시 주촌면 내삼농공단지에서 발생한 산사태로 흙더미에 매몰돼 실종된 삼흥열처리 소속 근로자 이정훈(28.부산시 강서구 대저2동)씨의 아버지 상수(56)씨는 줄곧 수색 현장을 지키며 아들의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애간장을 태웠으나허사였다. 상수씨는 아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한때 `기(氣)전문가'를 동원하고 최근에는 신통하다는 `도사'까지 초빙했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인근 사찰에 아들의 위패만 안치했다. 독자를 잃고 맞이하는 `가장 슬픈 명절', 이씨는 위패가 안치된 사찰에서 49제와 영혼제로 시신없는 아들을 멀리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 이번 태풍으로 2천200여기의 묘 가운데 300기가 유실되고 500기가 매몰된 강릉공원묘원은 추석을 앞두고 조상묘를 찾으려는 유가족들의 발길과 함께 안타까운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유가족들은 유전자 및 지문감식 신청을 계획하고 있지만 추석전까지는 확인이불가능한 실정이다. 모친 묘소가 매몰된 유가족대책협의회 김규현(43)위원장은 "유실 및 매몰 사체수습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뿐 유가족들에게 이번 추석은 오히려 서러운 명절이 될것"이라고 말했다. 경북 성주군 금수면 어은 1리 홍영욱(56)씨는 올 추석이 두렵기만 하다. 지난달 31일 태풍이 지나가던 날 30번 국도변에 있던 조상들의 묘 3기가 산사태로 흔적도 없이 매몰됐기 때문이다. 상석 3개가 모두 유실되고 무덤을 지키던 망석도 2개 가운데 1개가 없어졌다. 홍씨의 마음을 더 무겁게 하는 것은 묘지가 완전 매몰돼 조상님들의 시신 수습조차 힘들게 된 것이다. 홍씨는 "중장비를 동원, 추석전에 조상님들을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모시고 싶지만 지금으로서는 시신조차 찾을 수 없어 막막하기만 하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김해시에서 마련해준 5.5평형 컨테이너를 임시거처로 사용하고 있는 경남 김해시 한림면 주민들은 추석이 다가올수록 어떻게 조상을 모셔야 할 지 애만 태우고 있다. 김옥희(54.여)씨는 "차례상 차릴 여력도 없는데다 비좁은 컨테이너에서 10남매가 모여 차례를 지내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며 "조상님 볼 면목이 없지만 차례를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고 말했다. 강원도내에는 8개 시군에 2만2천920가구 7만2천660명의 이재민이 발생, 이 가운데 4천여명이 넘는 수재민이 1천510채의 컨테이너에서 추석을 보내게 됐다. 그러나 전체 46농가 가운데 30농가가 수해를 입은 삼척시 미로면 상정리 주민들은 "비록 수해로 어려움은 많지만 컨테이너 하우스에서라도 차례를 지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며 나름대로 추석맞이 준비에 분주하다. 특히 지난 15일에는 대한적십자사에서 마을 공동으로 차례상을 차리겠다면 모든준비를 해서 마을을 찾겠다고 알려와 주민들은 마을회의를 열고 공동차례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이번 태풍으로 전재산인 가로.세로 각 6m 크기의 양식장 18조가 모두 날아가버린 여수시 화정면 화산마을 어민후계자 문명선(44)씨는 "추석 맞이를 생각할 겨를이어디 있냐"며 한숨짓고 있다. 문씨는 행여나 바다에 양식장 시설 일부가 떠 다닐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작은어선으로 매일 새벽부터 밤까지 인근 바다를 헤매고 있으나 아직 아무런 소득을 거두지 못해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루사'의 우리나라 최초 상륙지인 전남 고흥지역의 44가구 107명의 이재민도이번 추석을 친인척 집이나 마을회관에서 지내야 하는 기막힌 상황이다. 김천시 황금동 김성진(51)씨는 지난번 수해로 가재도구 대부분을 못 쓰게 됐지만 무엇보다 족보책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훼손돼 눈앞이 캄캄하다. 또 지난해 형제들과 힘을 모아 큰 마음먹고 장만한 옻칠 제기와 8폭 병풍도 못쓰게 됐다. 김씨는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와 제수용품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고 있는데다 제기까지 다시 장만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추석 나기가 두렵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