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를 빼놓고는 한국 과학기술의 역사를 얘기할 수 없다. 설립부터가 파격적이었다. 1965년 5월 박정희 전대통령과 존슨 미국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통해 KIST를 설립키로 했다. KIST가 맡은 임무도 특이했다. 한국 산업의 밑그림을 만드는 것이었다. 김재관 박사팀은 포항종합제철 건설안을 만들었고 최형섭 박사팀은 외제차의 국산화를 추진했다. 김완희 박사팀은 전자공업진흥 보고서를 만들었다. 기계산업과 조선산업의 기반 마련도 KIST 과제의 하나였다. 최형섭 초대원장은 해외에서 한국인 과학자 유치에 나섰다. 70년까지 해외에서 29명을 유치했다. 70년엔 산업기술 개발에 앞장섰다. 홍삼 가공시설은 전매청에 기술이전됐다. 폴리에스터 필름도 이때 개발됐다. 선경화학(현 SK)은 이 기술을 이전받아 양산체제를 구축, 한국이 세계 시장의 40%를 차지 할 수 있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냉장고 냉매로 쓰이는 프레온가스 생산 기술도 선보였다. KIST부설 한국선박연구소가 76년 한국선박연구소로 분리 독립되는 것을 시발로 주물기술센터 정밀기계기술센터 전자통신연구소 전자기술연구소 등이 잇따라 떨어져 나갔다. 이때부터 외형이 줄어들면서 위상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80년에는 한국과학원(KAIST)과 통합되면서 전환기를 맞았다. 연구기관에 교육기능까지 합쳐지면서 홍역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기술개발에서는 명성을 이어갔다. 인조다이아몬드, 결핵치료제 '리파마이신', 간.폐디스토마 구충제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인조 다이아몬드 생산기술은 일진에 의해 산업화돼 연간 수백억원의 수입대체 효과를 거뒀다. 귀밑에 붙이는 멀미약은 대일화학공업에 의해 상품화돼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90년대 들어 KAIST가 다시 분리되면서 KIST는 연구기관으로서의 모습을 되찾는 듯 했다. 그러나 예전과는 상황이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대덕의 다른 출연연구소들과 기업체 연구소들이 몰라보게 달라졌던 것이다. 연구개발 인력 재정면에서 이들 연구소와 차별화할 수가 없었다. 결국 연구소의 맏형으로서 얼굴역할을 하는데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KIST의 인맥은 살아 있다. 김충섭 화학연구원장, 오길록 전자통신연구원장, 박호군 KIST원장 등이 바로 KIST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