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공이 함락되던 1975년 4월30일.사이공의 미국대사관 주변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요인들을 실어 나르는 헬기를 탈 수 있을까 하는 실오라기 희망을 안고 몰려든 수천명이 철조망 쳐진 담장에 매달려 절규했다. '사이공 최후의 날' 탈출에 실패한 베트남 사람들은 다투어 보트나 어선 또는 뗏목에 의지한 채 바다로 나갔는데,이들이 바로 '보트피플'의 원조였다. 그 후에도 캄보디아와 중국과의 전쟁,경제난 등으로 해상난민들은 더욱 불어나 월남패망 이후 10년 동안 보트피플은 무려 1백50만명이나 됐다. 90년대 들어서는 쿠바인들이 보트피플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주민들이 주로 뗏목을 타고 미국으로의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94년 한햇동안의 탈출자수는 4만여명이었고,송환문제를 둘러싸고 미국내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던 99년의 '엘리안 사건'도 결국은 보트피플이 야기한 것이었다. 오랜 기간 전쟁에 시달려온 많은 아프가니스탄인들도 보트에 몸을 맡기고 있는 신세라고 외신은 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육지에서 살아가기 힘들 때 최후의 수단으로 바다를 택하는 것 같다. 망망대해에서의 일엽편주는 '바다의 아우슈비츠'라 할 만큼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일텐데도 그들은 대양을 찾아 나선다. 인간대접을 받으며 '잘 먹고 잘 살아보겠다'는 마음이 무엇보다 가장 절실하기 때문일 게다. 며칠전 어선을 타고 서해 공해를 거쳐 넘어온 순종식씨 가족 등 21명도 "식량난 등으로 생계유지가 힘들어 자유로운 남한 사회를 동경해 왔다"고 털어 놓았다. 역시 어선을 타고 '따뜻한 남쪽나라'를 찾아 나선 김만철씨나 5년전 목선을 타고 야음을 틈타 남하한 김원영씨도 그 탈출동기는 다르지 않았다. 이번 순씨의 해상탈북을 두고 우리나라에서도 보트피플이 시작되는 신호가 아니냐는 말들이 많다. 중국의 단속강화로 육로가 막힌 상황에서 해상이 유일한 탈출구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보트피플은 이제 먼 나라의 비극이 아닌 우리 자신의 문제로 바짝 다가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