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설 경영전문기자의 '경영 업그레이드'] 직장 생활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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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계 컴퓨터업체의 영업담당인 L부장.
40대 중반인 그가 요즘 동료들과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하나 뿐이다.
바로 "회사를 관두면 뭘 하면서 먹고 살 것인가"다.
며칠전 회사가 조기퇴직제도 시행 방침을 밝히자 불안해진 사람들끼리 모이는 일이 잦아졌다.
L부장은 "명예퇴직 고비를 몇번이나 넘겼는데도 또 다시 대상이 됐다"며 "50세 이후에 계속 할 수 있는 직업이 뭘까 생각해보지만 답이 없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삼성 계열의 한 업체는 최근 간부사원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가졌다.
첫날 교육을 받은 대다수의 간부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교육과목이 지금 하고 있는 일과는 별 상관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2의 직업 인생을 준비하라" "은퇴 이후엔 무엇을 할 것인가" 등이 강사들이 강조한 토픽들이었다.
휴게실에서 이 회사 간부들이 나눈 대화는 한마디로 이랬다.
"회사를 다니라는 거야,말라는 거야?"
경제 위기 이후 5년,나라 차원의 구조조정이 어느 정도 일단락됐지만 불안의 세월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기업에선 구조조정이 상시화되면서 불안이 직장인들 곁에 늘 자리하게 됐다.
이 불안은 초기엔 경영진들에게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인력감축 드라이브 와중에서 상부의 명령은 즉각 실행됐다.
알아서 조기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는 사람들도 늘었다.
불안이 긴장감으로 승화돼 근무기강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던 셈이다.
이제는 아니다.
긴장감으로 승화되지 않은 불안이 오히려 마이너스 요인이 되고 있다.
열심히 일하나 안하나 별차이가 없다고 느낀 이들이 일손을 놓고 있다.
L부장 같은 '나그네'들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 기업들이 '인재가 최고'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사람에 관심을 쏟고 있지만 과연 순기능만 있을 지 의심스럽다.
천재와 인재 등 엘리트 위주의 인사 정책이 혹 수많은 보통 직원들의 불안감을 높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기나 동기부여가 종업원들의 헌신을 이끌어내는 지름길임을 잘 알고 있는 경영자들이 오히려 그 사기와 동기를 꺾는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마음이 안정된 사원들이 많은 회사는 열심히 일하는 그 직원들 덕에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반대로 내일이 불안한 종업원들이 늘수록 회사는 위험해진다.
횡령 등 각종 사고 가능성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업체마다 쉬쉬하고 있지만 당국에 신고 안된 거액 횡령 사건이 최근 끊이질 않고 있다는 소식은 이런 분위기의 반영일 뿐이다.
경영진들은 구조조정과 불안감이 상시화된 지금이야 말로 종업원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회사원들은 현재의 고통보다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더 싫어한다.
조금이라도 비전이 낫다고 생각되는 회사라면 앞뒤가리지 않고 옮겨버리는 일들이 잦아질 게 분명하다.
엔지니어들이 많은 회사를 중심으로 전직지원제도(outplacement)를 마련하는 업체들이 늘고 있는 건 그래서 바람직한 추세다.
새로운 기술도 가르쳐주고 새 직장까지 알선해주는 회사라면 불안감 대신 신뢰가 싹틀 수 있다.
물론 책임은 개개인에게 있다.
지금 직장 이후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비전은 스스로 세우는 것이다.
삼성 계열사의 예처럼 회사가 사원들에게 직장 생활 이후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있는 변화라 하겠다.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