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ONG KOREA] 제1주제 : 서울공대 출신 CEO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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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대만을 번갈아 가면서 1년에 한차례씩 열리는 동아시아 석유화학회의는 서울대 화공과 출신 CEO(최고경영자)들의 동문회로 통한다.
낯선 얼굴과의 첫마디가 '몇기인가'다.
1950~60년대 화공과 졸업생뿐만 아니다.
70년대 이후 기계과에서 전자공학과 컴퓨터공학과로 이어지면서 수많은 스타들을 배출해 냈다.
서울대 공대는 자타가 인정하는 이공계 분야 스타의 산실이다.
서울대 공대인들은 어떻게 성공했는가.
현역 CEO로 뛰고 있는 서울대 공대인을 통해 그 비결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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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학번 '손욱 삼성종합기술원장' ]
< 약력 >
-1963년 경기고 졸업
-67년 서울대 기계공학과 졸업(63학번)
-67년 한국비료공업 입사
-75년 삼성전자 입사
-89년 연세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93년 삼성전자 전략기획실장 부사장
-98년 삼성전관 대표이사 사장
-현 삼성종합기술원장
우리 세대는 중화학공업 중흥기와 호흡을 함께했다.
공대 졸업 후 갈 만한 회사로는 한국기계 이천전기 한영모터(현 효성중공업) 등과 비료회사가 꼽혔고 그 외에는 별로 갈 곳도 없던 시절이었다.
기계공학과 출신들은 이런 곳에서 필요한 기본 지식을 갖췄고 여러 모로 쓸모가 있었기 때문에 가장 환영받았다.
특히 서울대 공대생의 경우엔 기업들이 군대도 마치기 전에 미리 뽑아 입도선매할 정도로 주가가 높았다.
또 우리가 졸업하던 시점에는 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 수출진흥책을 본격적으로 펼친 시점이어서 할 일이 무척 많아졌다.
우리 대학시절엔 모두들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졸업 후 유학을 떠난 사람도 전체의 20% 정도밖에 안된다.
하지만 미래가 밝았기에 꿈과 희망이 있었다.
특히 기계공학과 학생들은 최고의 학과에 다닌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이 대단했다.
당시 공릉동은 서울에서도 외진 곳이었다.
청량리에서 공릉동까지 가는 버스는 30분에 한 대씩밖에 없었다.
서울대 공대생들이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시내 나가기 힘들어서"라고 농담할 정도였다.
63학번 과 동기로는 이장무 서울대 기계공학과 교수, 김유채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 곽병만 KAIST 교수, 정영근 휴먼텍코리아 사장 등이 있다.
당시 공대생들은 졸업 후에는 현장에서 기술을 익히고 '3년간은 기름때를 묻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사회에서도 기술자를 우대해 기술자들은 자부심이 강했다.
우리 세대는 다양한 일들을 했다.
돌이켜보면 일의 성격은 달라도 중요한 것은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공대생으로서 엔지니어의 길을 걸어온데 대해 보람을 느낀다.
최근 이공계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이 예전만 못해 공대생들의 사기가 떨어졌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후배들에게 '사회생활할 때 곁눈 팔지 말고 한우물을 파면 반드시 길이 생긴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