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러시아 공관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러시아가 우리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때가 있었다.
고종과 왕세자가 왕궁을 빠져나와 1896년 2월부터 1년여를 러시아공관에서 생활했던 소위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시기였다.
당시 한반도는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
일본 중국은 물론 미국 독일 러시아 영국 등이 조선과 잇따라 수교하면서 이권 챙기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그중에서도 일본은 가장 야심적이었다.
대륙진출을 위해 청일전쟁을 일으켜 그 전리품으로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할양받았고 동시에 조선에서의 우월권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독주에 견제구를 던지며 나선게 러시아였다.
프랑스 독일과 연합해 이른바 '3국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토록 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자,조선에서는 배일친러(排日親露) 분위기로 급변하면서 친러 친미경향을 보이던 정동파 인사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여서 고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꼈고,이를 틈탄 이범진 이완용 등 친러파 세력이 러시아공사였던 웨베르와 모의해 고종을 러시아공관으로 피신시켰던 것이다.
아관파천으로 조선의 자주성은 손상되었을 뿐더러 열강들의 경제적 침탈은 가속화됐다.
1917년 소연방수립과 함께 철수했던 러시아공관이 지난 주말 정동의 옛 배재고 부지에 새로이 터를 잡았다.
6·25전쟁으로 불에 타 지금은 탑부분만 남아있는 원래의 러시아공사관과는 1백m 떨어진 곳이다.
러시아는 소연방붕괴 후 외국공관을 처음 지어서인지 이바노프 외무장관의 방한에 맞춰 준공식을 하는 등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한다.
대부분 궁궐터였던 정동은 미국이 옛 경기여고 부지에 대사관과 직원용 아파트건립을 강행할 방침이어서 큰 논란을 빚는 지역이기도 하다.
신축된 러시아공관은 미국대사 관저와는 불과 2백m 정도 떨어져 있다.
외국공관 빌딩의 숲에 에워싸일 덕수궁.더욱 납작하고 왜소해질 것을 생각하면 착잡하기만 하다.러시아 공관 신축은 이래저래 감회가 적지 않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