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린은 우리 뇌에 불에 데인 것과 같은 강렬한 화인을 남기고 홀연히 세상 저편으로 날아갔다. 전혜린은 그의 생애에 이룬 업적 때문에서가 아니라 "무섭게 깊은 사랑,심장이 터질 듯한 환희,죽고 싶은 환멸"등을 추구하는 무서우리만큼 비범한 삶의 자세 때문에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그의 생을 통해 이룬 몇 권의 번역서,유고(遺稿)로 출간된 수필집,일기문 따위는 문학 이전의 습작 수준이다. 레닌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가리켜 "로자는 혁명의 독수리였으며,독수리로 남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 말을 빌어 우리는 전혜린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혜린은 인식에의 갈망으로 불타오르는 독수리였으며,영원한 독수리로 남을 것이다"라고. 한 지인에게 "어느 조용한 황혼에 길가의 주막에 쓰러져 있는 집시가 있거든 나라고 알아줘!"라고 속삭였던 전혜린.점성술과 운명학을 믿고 가끔 점을 치며 '운명의 위대한 저울 위에' 내던져진 제 운명을 불안한 시선을 번득이며 가늠해보던 전혜린은 31세로 요절하며 이 세상에서의 짧은 생을 휘발시킨다. 그는 특이하게도 자신의 생으로 이룬 '업적'이 아니라 절대 인식에의 끝없는 갈구와 열띤 방황이라는 삶의 자세와 태도만으로 죽은 뒤 '전혜린 신화'를 일궈냈다. 1964년 1월 9일 토요일.하늘은 마치 수정처럼 맑고 푸르고 깊었지만 기온은 영하 10도 이하로 급강하한 몹시 추운 날이었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앞의 동숭동 학림다방 오른편 맨 구석의 창가 자리에 밤색 밍크 코트를 입은 여성이 오후 들어 몇 시간째 잔설(殘雪)을 이고 있는 바깥 풍경을 무심한 시선으로 내다보며 혼자 앉아 있었다. 한 젊은 여성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고, 검은 스카프를 한 채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여성이 손을 흔들었다. "세 시간이나 여기서 기다렸어!" 그날 약속 없이 학림 다방에 들렀던 서울대 법대 후배인 이덕희(李德姬)가 전혜린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그들은 다방 한가운데 놓인 난롯가로 자리를 옮겨 앉아 토요일 오후를 담소로 보냈다. 저물 무렵 학림 다방을 빠져나와 명동에 있는 은성으로 갔다. 은성은 당시 문화 예술인들이 단골로 드나들던 유명한 대폿집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합석해서 두어 시간 동안 떠들어댔던 그날의 술자리는 매우 유쾌했다. 전혜린은 무척 고조되어 보였고,다른 날과 달리 더 자주 웃고 더 큰소리로 많은 말들을 했다. 곧 수필집을 낼 예정이고,책 제목도 정했다고 했다. 전혜린은 이덕희에게 귓속말로 "제목은 나중에 너한테만 알려줄게"라고 속삭였다. 그는 국제 펜클럽대회에 참가할 예정이며,그 때문에 건강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글쎄 내 몸이 괴물처럼 건강한 거야." 짧은 겨울해가 지고,바깥은 이미 어두워진 뒤 은성에서 나온 전혜린과 이덕희,동행했던 후배 등은 한 잔 더 하기 위해 신도호텔 살롱으로 자리를 옮겼다. < 시인·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