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무구함과 무욕으로 무장한 천상병은 생전에 자본주의적 관행과 생리에 대해 무차별적인 테러를 감행한다. 그는 시쓰기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그는 유유자적 떠돌며 동료 문인들과 시인 지망생들에게 술값이나 밥값 명목으로 2천원씩을 아무 거리낌없이 뜯어낸다. 시인은 악의 없는 "갈취범"이었다. 그래서 그를 미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미워하기는커녕 희귀한 문화재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이 햇빛에도 예금 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내 무덤가 무성한 풀잎으로 때론 와서/괴로왔음 그런 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씽씽 바람 불어라.'('나의 가난은') 병원에서 요양하며 몸과 마음을 추스른 시인은 1972년에 친구의 손아래 누이인 목순옥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 79년에는 첫 시집 '새'에 실린 작품들을 거의 다 옮겨 실은 시선집 '주막에서'를 민음사에서 펴낸다. 이어 84년에는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87년에는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을 내놓는다. 말기에 이르면 천상병은 천진난만할 정도로 단순한 어조로 기독교의 신인 하느님을 예찬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88년 만성 간경화증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한 시인은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으나 불사조처럼 살아난다. 이후 그는 시집 '요놈! 요놈! 요 이쁜 놈!'(1991),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를 펴낸다. 93년 4월 28일, 병든 몸으로 누워 있던 시인은 마침내 숨을 거둔다. 천상병이 고단한 이 세상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던 날,의정부시립병원 영안실 밖으로는 추적추적 봄비가 내렸다. 그가 죽고 난 뒤 몇 백만원인가 하는 조의금이 들어왔다. 시인의 장모는 그걸 사람들 손이 타지 않는 곳에 감춘다고 감춘 것이 하필이면 아궁이 속이었다. 그걸 모르고 시인의 아내는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가난하게 하지만 순진무구했던 시인이 죽어서도 '만악의 근원'인 돈을 없애버리려고 '장난'을 했는지도 모른다. < 시인·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