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국 축구대표팀이 폴란드를 이기던 그날 밤,우리 국민 모두는 미쳤다. 거리에서,운동장에서,대형 전광판과 텔레비전 앞에서 서로 껴안고 승리의 함성을 질러댔다. 3·1 독립만세운동과 8·15 광복절 이래 우리 민족이 이토록 미쳐 본 적이 또 있던가. 우리 태극전사들의 쾌거는 온 국민을 붉은 악마로 몰아갔다. 붉은색 물결은 땅을 뒤덮고,초여름 밤하늘마저 위협했다. 4천7백만 온 국민은 감격했고,세계는 놀랐다. 어찌 이것을 한국축구의 한을 푼 승리로만 볼 수 있겠는가. 한국인은 참 희한한 민족이다. 경기를 할수록 체력이 강해지는 선수들.12번째 선수가 되어 훌리건에게 응원의 진수를 보여준 붉은 악마들.너나 할 것 없이 붉은 셔츠로 갈아입고 열광의 도가니에 빠진 국민들.도대체 이런 극성스러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세계 스포츠는 이미 자본주의 시장에 좌우되고 있다. 미국의 플로리다에는 일찌감치 학교를 때려치운 10대 초반의 선수들이 프로 테니스 선수로 양성되고 있다. 남아프리카 출신의 어니 엘스가 세계적인 골퍼가 된 것은 걸음마를 할 때부터 집에 있는 그린에서 조직적인 퍼팅 연습을 한 덕분이다. 그런데 '시민체육'이라는 개념조차 없는 한국에서 세계적인 선수들이 속속 배출되고 있다. 그들은 경운기를 타고 다니면서 연습했고,공동묘지에서 담력 쌓는 훈련을 했다. 뛰어난 스승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해내고야 말겠다'는 헝그리 정신뿐이었다. 우리에게도 은메달 하나에 열광하던 시절이 있다. 또 다리 짧은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달리기를 해서 금메달을 받은 이래 황영조가 나타났고,이제는 금메달을 무더기로 따온다. 이변은 축구에도 나타났다. 월드컵 본선에서 단 1승도 기록하지 못하던 한국팀이 최초의 승리를 따낸 것이다. 그것은 기적의 드라마였다. 무한한 잠재력과 역동적 에너지로 꿈틀거리는 한국인.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우리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하고,영웅을 절대 용납 안하는 사람들이다. 스스로 '최고'라고 믿는 이면에 '압축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다. 서구는 계급을 극복하기 위해 오랫동안 투쟁했다. 그러나 한국은 모든 과정을 단기간에 겪어냈다. 비록 수동적인 상황이었지만,급격한 계층붕괴는 모두 '평등'하다는 생각과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탈리아인 모두가 배우라면,한국인 모두는 신화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다. 쌀가게 점원을 하던 고 정주영 회장은 세계 굴지의 기업을 일궈냈고,초등학교 출신 임권택은 칸에서 최고 감독상을 받았다. 섬 마을 소년은 대통령이 되고 노벨 평화상까지 거머쥐었다. 한국인은 그들을 존경하고 또한 무시한다. '나도 박찬호 선수가 되고 이건희 회장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신화가 있는 사람은 그 누구의 성공도 부럽지 않다. 어떤 실패도 두렵지 않다. 한국 축구가 '꼴찌의 반란'을 일으킨 것도 따지고 보면 '할 수 있다'는 신화로부터 기인한다. 한국인은 베팅을 좋아한다. IT에 베팅하고,자식에게 베팅하고,미래에 베팅한다. 그러나 냄비처럼 끓는 투혼만으로는 부족하다. ADSL,PC보급률,휴대폰,인터넷 이용자가 세계 1위라지만 아직은 속빈 강정이다. 하드웨어 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중요하다. 문제는 실력이다. 폴란드에 얻은 승리는 원리에 입각한 단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네덜란드 출신의 거스 히딩크 감독은 우리 한국 축구선수들의 기본 체력을 키우고 전천후 테크닉을 연마하는 훈련을 강행했다. 몇 사람의 스타가 아닌 팀워크에 의한 다각적인 전술을 구사했다. 4무10패 끝에 얻은 1승은 어여쁘고 소중하다.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무한의 값어치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는 더욱 극성스러워야 한다. 이번에는 결승까지 가지 못해도,빠른 시간 안에 우승컵을 거머쥘 것이다. 우리의 극성스러움은 또다시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제 대표팀과 함께 숨을 쉰다. 가는 데까지 가 보자. 줄리아드를 접수하고,하버드를 접수하고,월드컵을 접수하자.미치고 싶을 때 미칠 수 있는 것도 특권이다. 오,필승 코리아! 미국이여,기다려라.우리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