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땅에 떨어지지 못한 잔 빗방울이 하늘 가득 바람결에 흔들린다. 18번 국도변의 산 허리춤부터 온통 뿌유스름한게 하늘의 경계가 바짝 내려선 것 같다. 가벼우면서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향내가 차창으로 밀려든다. 잊을라치면 코 끝에 와 있는 그 향내가 점점 짙어진다. 아하! 벌써 차밭에 가까워졌구나. 한국다도의 중흥조인 초의선사가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었던 해남 대흥사와 지척, 보성차밭 여행길은 네가지 즐거움을 선사한다. 멀리서부터 온몸을 감싸는 차향이 첫째, 입안 가득 맑은 기운의 차맛이 둘째, 산자락을 초록융단으로 덮은 듯한 차밭풍광이 셋째, 여기에 함께 한 이들의 마음을 풀어 이어주는 묘한 분위기가 더해진다. 몽중산다원으로 들어선다. 봇재를 중심으로 한 18번 국도변의 첫 다원이다. 시음장 안은 앉은뱅이 차상이 가지런하다. 다함속의 맏물차를 우려내 입술을 적신다. 창(滄.뾰족한 새싹이 말려 창과 같이 생긴 것)과 기(旗.펴지지 않고 오그라든 깃발 모양의 여린 잎)로 만든 세작(細雀)이란다. 입안이 깔끔해지는 것 같은데 솔직히 그 깊은 맛은 알 수 없다. 다도란 일상생활속에서 진리를 구하고자 했던 초의선사처럼 '좋은 차와 물을 알맞게 넣어 중(中)을 얻고, 찻물이 우러나 화(和)하면 중도(中道)를 얻게 된다'는 경지에 이르지 못한 때문일까. 아무튼 몽중산다원은 여느 다원보다 차맛이 좋기로 손꼽힌다. 50대 초반의 여행객이 한마디 거든다. "요즘에는 이 몽중산에서만 차를 들게 돼. 우리끼리는 말이야, 친구가 다른 다원에서 한 모금 차를 마시면 바람났다고 하지." 전남대에서 간호학을 가르치다 정년을 맞은 김영숙 대표의 앞선 유기농법이 남다른 차맛의 비결. "퇴비를 주고, 지렁이를 놓아 땅을 살렸어요. 약을 치지 않으니 천적도 생기더라구요. 94년부터 3년간 땅이 적응하기까지 수확도 못했는데 이제는 입소문을 타 알만한 사람은 다 알아요." 차밭은 근방에서 3번째 크기라는데 다소 옹색한 편. 김 대표가 양보한다. "눈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옆 다원으로 가시죠." 바로 옆은 CF 촬영으로 유명해진 대한다업의 보성다원. 입구의 쭉 뻗은 삼나무 숲길부터 예사롭지 않다. 그 길을 천천히 올라가면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진다. 30여만평의 차밭이 산의 이편 경사면에 펼쳐져 있다. 전국 28%, 전남의 40% 차를 생산하는 이 지역 차단지중 가장 큰 다원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초록 융단을 가로로 차곡차곡 펼쳐 놓은 듯한 차밭이 삼나무숲과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 게다가 착 내려 앉은 안개까지... 보성군 관광해설가 신덕순씨는 "보성차는 야생차와 성분이 같다"며 '질의 보성차'를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다. 울산에서 당일여행을 온 김선정, 박금득씨는 차밭 여행에 또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사이가 벌어진 친구도 여기만 오면 예전처럼 친해진다고 하데요. 보성 차밭은 처음인데, 과연 그럴만도 하네요. 이 풍광을 앞에 두고 어디 눈쌀을 찌푸릴수 있겠어요." 보성=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