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미국에서 예비선거가 한창 진행중일 때,난데없이 후보들의 학교성적표가 공개돼 법석을 떨었다. 발단은 당시 부통령으로 민주당의 대선주자였던 앨 고어의 성적표가 언론에 공개되면서였다. 워싱턴의 명문 사립고인 앨번스를 다녔던 고어의 성적은 미술만 A학점일 뿐 B와 C가 수두룩하며 졸업성적도 중간정도에 그쳤다. 하버드 대학에서도 출중한 성적을 내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이를 두고 말이 많았다. 지성적으로 보이는 고어의 이미지를 완화하기 위해 선거캠프에서 일부러 성적표를 흘린 것이라는 얘기도 나돌았다. 공화당 예비선거에 도전했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도 자신이 해군사관학교를 꼴치에 가까운 성적으로 졸업했음을 마치 훈장인냥 공개했다. 부시 대통령 역시 대학진학적성검사(SAT)점수가 썩 좋지 못했고,예일 대학을 다녔지만 학점이 그저 그랬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공부 잘한 사람이 반듯이 훌륭한 대통령은 아니었다"는 속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너무 사색적이어서 행정부를 제대로 꾸려가지 못했다는 비판이 아직도 공공연히 회자되는 걸 보면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대선을 앞두고 유력 후보들의 학교 성적표와 생활기록부가 공개되고 있다. 그들의 학창생활이 결코 '튀지'않고 '평범'했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 의도는 지극히 간단하다. 공부만 파는 '모범생'이 아니다. 흔히 모범생이라고 하면 이기적이고 융통성이 없으며 인간성이 부족한 것으로 인식되는 수재형과는 애시당초 거리가 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지도자의 조건으로,결단을 내리는 건전한 상식과 국민과 가까이 하는 친화력을 꼽으며 그리 지성적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결국 '나도 당신들과 똑 같은 사람'이라는 의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미국 상·하원 의원들이 원래의 이름 대신 딕,톰,조 등 애칭으로 등록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어찌됐든 대통령이 성적순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