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大韓民國) 김관식(金冠植)" 명함에 그렇게 새기고 다니던 시인 김관식(1934~1970)이 4.19 직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는 소문이 문단에 파다하게 퍼졌다. 어떤 사람은 껄껄 웃으며 김관식답다고 했고,어떤 사람은 무슨 돼먹지 못한 망발이냐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쨌든 하늘을 찌르는 자만심과 호방한 기개에 넘쳐있던 26세의 김관식은 서울 용산구에 출마했다. 상대는 민주당 신파의 거물인 장면(張勉)이었다. 결과는 자명했다. 김관식은 떨어졌고 선거를 치르느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을 남김 없이 털어먹고 말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기와 술과 기행(奇行)뿐이었다. 그는 세검정 밖 홍은동의 산비탈 국유지 일대를 무단 점거하고 거기에 집을 짓고 살았다. 지금은 연립주택 등이 빽빽하게 들어선 주택지이지만 당시에는 그 일대가 능금이며 자두나무가 심어져 있던 과수원과 잡목들이 우거진 채 방치된 주인 없는 땅이었다. 시인의 눈에 저 귀한 땅을 쓸데없이 놀리는 것은 낭비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날 시인은 그 국유지에 목수와 인부들을 동원해 여러 채의 집을 한꺼번에 짓기 시작했다. 판잣집은 한나절에 한 채씩 생겨났다. 무허가 불법가옥이었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구청 직원들에 의해 그 판잣집들은 철거되었다. 김관식은 이튿날 다시 목수와 인부를 동원해 집을 지었다. 한 채 두 채가 아니고 십여 채의 집을 지었다. '보옥(寶玉)을 갖고도 자랑하지 않는 겸허한 산'에 시인들만 사는 마을을 건설하고 '산에서도 오히려 산을 그리며' 살려 했던 것이다. 한때 황명걸 조태일 같은 시인들이 실제로 시인이 지은 집에 살기도 했다. '산에 가 살래./팥밭을 일궈 곡식(穀食)도 심구고/질그릇이나 구워 먹고/가끔,날씨 청명(淸明)하면 동해(東海)에 나가/물고기 몇 놈 데리고 오고/작록(爵祿)도 싫으니 산에 가 살래.'('居山好·1') 시인의 삶은 고달팠다. '가난! 가난! 가난 아니면/고생! 고생! 고생이랬다' 낮거미가 집을 짓는 홍은동 산비탈의 누옥 바람벽에는 썩은 새끼에 시래기 두어 타래가 내걸린 채 바람에 흔들렸다. 끼니마다 감자를 삶아 먹고,호랑이표 시멘트 종이로 도배를 한 방에서 한·미간의 우정과 신뢰의 악수 문양이 새겨진 밀가루 포대로 홑청을 한 이불을 덮는 누추한 삶이지만,'화옥(華屋)에 고차(高車)·금의(錦衣)·옥식(玉食)을 꿈에도 기루어 하지를 않았다'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게으르게 일어나 조로에 물을 담뿍 퍼 들고 텃밭에 심은 상치 쑥갓 아욱들에 물을 주었다. 그가 꿈꾼 것은 여름 저녁 때 생모시 옷고름 고의적삼 바람에 합죽선으로 해를 가리고 산책할 수 있는 여유가 허락되는 청빈낙도의 삶이다. 그런 청심과욕(淸心寡慾)으로 하루 세 끼의 끼니에 자족하는 삶을 두고 '왕(王)·후(侯)·장(將)·상(相)이 부럽지 않고 백악관(白堊館) 청와대(靑瓦臺) 주어도 싫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는 호구지책으로 서울상고(지금의 경기상고)에서 잠시 교편생활을 하기도 하고 세계일보의 논설위원직에도 있었으나,그의 파천황(破天荒)적인 기행과 면모를 오래 참고 받아줄 직장은 이 세상에 없었다. 어느 출판기념회에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인 장기영이 축사를 하고 있었다. 술에 취해 뒤늦게 출판기념회에 모습을 나타낸 김관식은 씩씩하게 장기영 앞으로 나서며 그를 밀쳐냈다. "자네는 그만 하게.내가 할 말이 좀 있으니까…"라고 말문을 연 그는 직정적인 육두문자를 펼쳐냈다. 그는 낭인이 되어 문단의 이러저러한 술자리나 출판기념회 따위를 누비고 다니며 도발과 공격을 일삼고 종횡무진으로 오연한 자긍심과 호방한 기개를 뽐냈다. 그는 가난했으나 거기에 주눅들어 비굴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시인·문학평론가